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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총선에서 보수정치의 아성인 대구 출마로 낙선한 후 1년 만에 대중 앞에 나타난 유시민. 그의 손엔 <후불제 민주주의>(돌베개, 2009)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히 강의와 저술 작업에 몰두한 지난 세월의 열매인 듯, 그 책의 향기는 제법 진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왔다. 출간된 지 한 달여 만에 벌써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진입하고 있다. 대중들이 다시 그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기치로 내걸기 위해 그의 손에 이 책 한 권을 들고 대중 앞에 나섰는가?

 

망명 혹은 유배에 대한 변증을 위하여(?)

 

저자는 지난 1년간의 자신의 칩거(?) 생활을 망명, 혹은 유배생활에 비유하고 있다. 이웃이나 국가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에 천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내적 망명" 상태요, 정치적으로 분리된 채 어두운 객석에 앉아서 현실을 관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유배생활" 중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무대에 올라갈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적 망명 중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국민과 함께 직접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정권 교체 이후, 경제위기와 함께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 위기의 현장 속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그 이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봉사는 충분히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그 현장에 있지 않다고 해서 유시민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명박 정부의 '문명 역주행'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현실적 참여 대신에 집필의 방식으로 그 해법을 찾아 나섰고, 그 결과를 책에 담아서 출판했다. 이렇게 출간된 <후불제 민주주의>는 자신의 망명 혹은 유배에 대한 변증 아닌 변증이 되었다.

 

왜 "후불제 민주주의"인가?

 

격동의 현대사를 통과하여 성취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그는 왜 "후불제 민주주의"로 정의하는가? 그의 이론적 단면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22)

 

대한민국은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받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3권이 주어졌"고,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되었기 때문에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해방 공간에서 미국의 점령 하에 만들어진 제헌헌법 덕분에 민주주의를 국시로 채택하는 행운(?)을 누렸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역사의 전 과정을 그런 환원론적 시각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겠지만 상당부분 긍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알지도 못한 채 우리의 국가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강요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대가 없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들을 외면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한민국의 선택은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최상의 가치로 본 국민적 자각에 따른 것이었고, 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런 점에서 "후불제 민주주의"는 우리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받아 누리는 "공짜 민주주의"가 아니라,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게 그의 주장의 요점이다. 우리의 땀과 눈물과 피로써 성취한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판단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다시 한 번 국민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가 정치 계몽에 나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성숙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헌법의 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을 더 많이 존중한다.

 

2009년 현재, 정권 변화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마도 이런 의식의 부재가 낳은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후불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유시민의 책은 그 바른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서 사회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문명 역주행"의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현상적으로만 봐도 민주주의를 구현한 지 60년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문명 역주행"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MB정부"의 정책 기조와 정치적 행위에서 그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대한민국 정부의 궁극적 이상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경제적 번영이라는 목표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발상은 수십 년 전 군사정부 시절로의 퇴행이 역력하다. 그런데 이런 "문명 역주행" 현상의 책임이 단지 정부에게만 있는가 하고 저자는 질문한다.

 

물론 그 1차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저자의 말대로 "권력자의 선한 의지"에 따라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비용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의 의지는 국민들의 의식을 무시한 채 무조건 퇴행할 수는 없다. 정부의 문명 역주행은 국민들의 불완전한 정치의식으로부터 그 동력을 얻고 있는 지도 모른다. 따라서 에너지를 차단한다면 그 주행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할 것이다. 유시민의 정치적 계몽은 바로 이런 콘텐츠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시킬 장치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가 문명 역주행으로 나아가는 동력 중에 하나로 "문화유전자"(meme)에 주목하고 있다. 도킨스에 의해 제안된 "밈"(meme)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규제하는 행동 매뉴얼의 집합"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 진화적 흐름 속에서 인간의 행동에 각인된 의식 작용을 말한다. 모든 사회적 존재자들은 여러 문화유전자들의 영향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처럼 문화유전자로 인해 진보적 관념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낡은 관념에 종속된다.

 

리처드 루이스는 이런 현상을 "문화적 블랙홀"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문화적 블랙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진화가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관념을 이끌어내어 문화유전자를 바꾸어야만 진보는 실현된다. 결국 문명 역주행을 막는 방법은 문화적 진보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진화된 의식으로 사회를 바라볼 때 모든 가치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진보를 향한 교육과 계몽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문화유전자는 자꾸만 대통령을 만백성의 어버이로 보게 만든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정파의 지도자로 보는 헌법 해석은, 이 문화유전자가 생성해내는 낡은 의식과 충돌한다. 이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성공하는 대통령이 나오기도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199)

 

정치적 성찰을 위한 계몽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민주주의 실현을 통한 문명의 진보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적 재고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인식에 따른 현실 정치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가 선택했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마땅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헌법에 들어 있다. 유시민은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당위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킨다. 저자는 헌법 제10조에 명시된 행복추구권의 내용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

 

저자는 "겉모양은 영어 번역문처럼 못나 빠진 헌법 제10조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31)고 고백하고 있다. 정말 우리의 헌법 조항에는 이런 아름다운 조항들이 들어 있었다. 그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국가 이념이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앞세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헌법은 행복, 자유, 자연, 국가, 복지, 애국, 법치, 인권, 종교 등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가의 이상을 이끌어간다면 유토피아인들 실현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이런 헌법의 꽃들을 아름답게 장식해서 대중 앞에 내 놓았다. 그것은 사실 액자틀 속에 들어 있는 고전주의 화가의 작품처럼 저들의 인식의 한 편에 무심정하게 걸려있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그 아름다운 헌법의 이상과 당위를 실현해야 하다는 지적 충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헌법의 당위가 우리 앞에 아름다운 희망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정치의 무기력함 때문이다. 정치가 헌법의 당위를 드러내주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헌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힘들다. 작금의 한국 정치는 더더욱 그렇다. 얼마 전까지 정치 일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또는 장관으로 일하던 정치인 유시민은 이 책 2부의 권력의 실재에서 한국 정치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 정치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그의 노력은 지식소매상을 넘어서 계몽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의 정치 소신을 일관되게 설명 내지는 설득하고 있다. 정당정치의 원칙, 법률과 복지 시스템에 대한 강조, 사회자유주의에 대한 강조 등이 바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가치들로 나타난다. 정당정치에 대한 입장에서는 그가 개혁정당 창당부터 열린우리당을 거쳐 대통합민주신당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정당 활동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정당정치의 입장이 드러나며, 복지시스템에 대한 강조는 그의 장관 경력이 주요 배경이 되고 있다. 특별히 그가 자신의 이념 성향을 "진보자유주의" 혹은 "사회자유주의"(236)로 규정함으로써 참여정부 시절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적 노선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내용들을 통해서 저자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의 대중화에 한 몫을 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 변화를 위한 계몽이었던 것 같다. 독자들로부터 정치적 성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정치와 행정의 경험을 사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정치세계는 대중들에게 낯익은 곳이 아니다. 그런 익명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이끄는 힘이 이 책에는 분명히 들어 있다. 장관이 되기까지의 그의 정치적 과정과 장관 시절에 그가 겪었던 청와대 에피소드만으로도 독자들은 그 내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이 되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암튼 이러 저러한 장치들을 통해서 저자는 책을 읽게 해 주었고, 그 읽음을 통해 정치적 성찰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점에서 계몽의 목적이 실현될 가능성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헌법의 당위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호소한다. 그의 호소는 이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길이 없다. 악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악한 상황을 종식시키려면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손잡는 수밖에 없다."(378).

 

악한 시스템 아래서는 악의 평범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를 위시해 많은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악한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과 선의 연대"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그의 호소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세력들의 연대(solidarity)로 귀결된다. 이 호소와 함께 그가 다시 대중들의 현장으로 돌아오려는 것인가? 그의 손에 이 책 한권이 들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행위는 가시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지금 경북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곳에서도 인식의 진보를 통한 선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선의 연대란 것이 반드시 시청 앞의 모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행동의 연대에 앞서 의식의 연대가 필요하다. 특히 선의식의 연대가 민주주의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하다. 이 책이 그 연대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꼭 그렇게 되어서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서평을 마무리 하면서 이 책의 요약을 다음의 문장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민주공화국은 호모사피엔스의 문명사에서 일어난 제도 진화의 최고봉이다. 민주공화국은 두 개의 토대 위에 선 문명의 건축물이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한 법률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 가치의 평등을 지향하는 복지시스템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 둘 모두를 명문화했다."(92)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돌베개(2009)


태그:#유시민, #후불제민주주의, #문명역주행, #문화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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