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신 햇살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따사로운 봄날, 구암 초등학교시절 등굣길이자 놀이터였던 군산시 경암동 '페이퍼코리아' 철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송사리도 잡고, 배추 꼬리도 얻어먹던 주변 논·밭들이 보이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학창시절 때는 트럭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신작로와 철길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도로가 바둑판처럼 나있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웠고, 사람들까지 떠나버려 허망하기 그지없었는데요. 녹은 슬었지만, 철로는 그대로인 것 같아 위로가 되었습니다.
'페이퍼 코리아선'은 어떤 철도?
구 군산역에서 조촌동에 위치한 신문용지 제조회사 '페이퍼 코리아'까지 선로는 집과 집 사이로 기차가 다녔던 철길인데요. 사람들은 '페이퍼 코리아선', '경암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는 회사 이름을, 하나는 철길이 지나는 동네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선로는 망해가던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44년에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준공했는데요. 1950년대 중반까지는 '북선제지 철도', 70년대 초까지는 '고려제지 철도', 그 이후에는 '세대제지' 혹은 '세풍 철도'로 불리다 세풍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서 '페이퍼 코리아선'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려제지 김원전 사장은 이승만 시절 자유당 후보로 출마,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돈선거로 당선됐고, 세풍 고판남 회장도 전두환 시절에 국회의원을 했던 적이 있는데요. 군산 시민이라도 50대 후반을 넘긴 세대는 '페이퍼코리아선'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길이가 2.5km밖에 안 되는 짧은 철길이지만, 크고 작은 건널목이 열 개가 넘었고, 교량도 경암동과 구암동에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지금은 건널목 차단기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교량도 복개공사로 우거진 잡초 속에서 흔적만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기차가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던 때도 주민들은 철길 주변에 평상을 내놓거나 종이를 깔고 밭에서 금방 따온 잡곡이나 고추, 나물 등을 말려 먹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지금은 창고나 뒷마당처럼 이용하고 있더군요.
초등학교 교실에서 봤던 기차
구암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정문과 신작로 사이에 건널목이 있었는데요. 지금의 '페이퍼코리아선'이 통과하는 철길이었습니다. 등굣길이나 하굣길에 기차가 막아도 짜증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요. 빨간색과 청색 깃발을 흔드는 차장 아저씨에게 인사하면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으니까요.
공부시간에 기차가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요. 서울구경이 가장 큰 소원이었던 저에게 기적소리와 함께 지친 듯 하얀 김을 내 품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꿈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한 마리의 새처럼 보였습니다.
기차가 지나가면 한동안은 상상의 세계로 빠졌지요. "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 아저씨는 한 달에 서울을 몇 번이나 갈까?", "저 철길을 따라가면 서울도 갈 수 있을 텐데, 걸어가면 며칠 걸려야 서울역에 도착할까?"라며 사진으로만 보던 서울을 그리다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던 그때가 새롭습니다.
철길마을은 영화 촬영지였고, 텔레비전 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으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을 정도로 유명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초등학교 시절의 애틋한 추억들이 담겨 있으니 즐거워야 함에도 마음은 그렇지 못했는데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것을 잃어버린 철길마을
마음으로 느껴지는 피사체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으면서, 봄이면 모내기하는 농부들의 농부가를 듣고 가을에는 다양한 표정의 허수아비 아저씨들을 보며 즐거워하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는데요. 세월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사는 초가였지만, 담을 넘어오는 소리만큼은 풍성했고 정겨웠습니다. "여보~"하며 아내를 부르는 아버지, "야뜰아, 언능 밥 먹그라!"라고 아이들을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그랬고, 형제들이 마당에서 놀다 싸움하는 소리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도시계획의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경포천이 매립되기 전인 70년대만 해도 철길 주변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집들도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로를 넓히고 아파트를 건축하면서 집이 들어설 공간이 좁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철길마을을 찾는 관광객이나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은 옛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며 "추억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동네가 군산에 있었느냐!"라며 감탄하는데요. 제 눈에는 조금 남아 있던 공간의 여유마저 사라진 아쉬운 동네로 보일 뿐입니다.
지금은 철로와 침목 사이에 뾰쪽뾰쪽한 모난 돌들이 갈려 있지만, 옛날에는 둥근 몽돌(모오리돌)이 깔렸었습니다. 우리는 '파독'이라고 했지요. 해변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데요. 만지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요, 색깔도 제각각이어서, 아름다운 돌이었습니다.
몽돌은 냇가나 해변에서 모진 비바람에 닳고 깎이면서 예쁜 모양의 돌로 탄생합니다. 공기놀이와 비석 치기를 하려면 공깃돌과 넓적한 막자를 구하려고 철길을 찾아 헤매고 다녔는데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철길에 쭈그리고 앉아 예쁜 몽돌을 줍던 그때가 새롭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철길마을을 거닐면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되살려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도, 경운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동네에서 옛 추억을 찾기가 어려웠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해서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게 아니라, 마음에서 찾아보는 것도 작은 지혜일 것이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추억은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