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벚꽃 활짝 핀 산길을 달려봤습니다. 마음에 번열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많은 것 중 하나가 진짜 알몸이 되어 달리기를 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연초마다 '알몸마라톤대회'라는 명칭으로 대관령이나 제천 등지에서 알몸마라톤대회가 열리지만 양말과 신발을 신는 것은 물론 심지어 타이즈를 입는 것까지 허용하고 있으니 무늬만 알몸일 뿐 알몸다운 알몸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알몸마라톤을 지난 주 수요일에 즐겼습니다. 월요일인 6일 저녁에도 올라갔었지만 맨발로 달리기를 하기에 딱 좋게 황토를 노랗게 깔아놓은 계족산 황톳길에는 아직 벚꽃이 먼개하질 않아 그냥 걷기만 했는데 이틀 만에 황톳길에도 벚꽃이 만개해 수요일부터 즐겼습니다.
보름을 이틀 앞둔 밤이라 그런지 달빛이 참 교교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달빛보다 더 교교했습니다. 회덕 정수장에서 출발해 타박타박한 발걸음으로 걸으니 밤 9시 20분쯤에야 노랗게 깔린 황토가 잘 다져져 있는 임도삼거리에 도착합니다.
한낮이라면 음료수를 파는 장사도 있고, 산길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겠지만 밤 중 산 속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없었습니다. 혹시 한여름이라면 초저녁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초봄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그런 사람들도 보이질 않습니다.
벚꽃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임도를 따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걷다보니 문득 알몸마라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껏 참가했던 알몸마라톤이 무늬만 알몸이었기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정말 홀딱 벗은 알몸으로 한번 달려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농담처럼 들렸을지 모르지만 계족산 황톳길에서 진짜 알몸마라톤을 한번 추진해 보라는 아이디어를 계족산에서 맨발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제공(?)하기도 했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달리는 맨발마라톤 대회니 고정관념을 박살내듯 몇몇 옷가지만 벗어버리면 어렵지 않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마음의 번열을 잠재울 수 있는 알몸마라톤대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홀딱 벗은 알몸으로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습니다.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벗을 게 없는 진짜 알몸이 되었습니다. 발바닥으로 전달되는 지온은 차갑고, 온몸으로 느끼는 기온은 썰렁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레 옷을 벗으니 기관지가 놀랬는지 콜록하고 기침이 납니다. 기침 몇 번 더하고, 놀라기라도 한 듯 닭살처럼 돋아 오른 소름은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달랩니다.
벗은 옷과 신발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작은 가방끈에 묶었습니다. 덜렁거리지 않게 묶는다고 묶었지만 넝마처럼 너덜거립니다. 산엘 갈 때는 아무리 가까운 산일지라도 항상 작은 가방을 메고 갑니다. 가방이라기보다는 허리와 어깨에 끈을 두르는 힙쌕입니다. 가방에는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맥가이버 칼, 물, 소금, 반창고, 호루라기, 랜턴, MP3 정도가 항상 들어 있습니다.
여느 대회처럼 물건을 보관해 주는 곳이 있거나 맡아 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것들조차 다 내려놓고 자유의 몸이 되어 팔딱거리며 뛰었겠지만 그럴 사람이 없으니 그것들을 어깨 끈에 너덜너덜 잡아매고 투덜투덜 뛰었습니다.
걷는 듯 뛰는 듯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오톨도톨하게 돋았던 소름이 어느새 촉촉해 졌습니다. 촉촉해졌던 피부가 끈적끈적해 지는가 했더니 땀방울이 느껴집니다. 어깨끈에 매달린 옷과 신발이 거추장스럽게 툭툭 몸에 부닥뜨리는가 했더니 팬티의 구속에서 해방된 알몸의 상징이 허전해지는 느낌이 들어 달리기를 멈췄습니다.
우연이라도 누군가가 봤다면 정말 별 희한한 인간 다 있다며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을 지도 모르지만, 달밤에 알몸 달리기, 달도 웃고, 벚꽃들도 웃었겠지만 달리는 나도 실컷 웃었습니다.
10리길 정도를 그렇게 달린 후 옷과 신발을 주섬주섬 챙겨 입거나 신고 벚꽃 활짝 핀 산길을 내려걷습니다. 달빛과 벚꽃은 하얀 색으로, 뾰족뾰족 돋아 오르고 있던 새싹들은 연초록빛의 눈으로 다 봤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교한 달빛, 달빛보다 더 교교한 벚꽃 길을 걸어 옷가지를 걸쳐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다시 찾아간 그곳, 황톳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대고 있었지만 만개한 벚꽃 나무에는 쑥스럽게도 알몸으로 달리고 있는 자아의 번열이 함께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