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대구 해방설이 유포된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나 전황은 교착 상태인 듯했다.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구체적으로 지명과 일시가 나오던 전승 보도는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일성이 강조한 '해방의 달' 8월도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지만, 인민군의 보도는 막연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느니, 완전 해방의 날이 가까워졌느니 등 보도는 구체성이 떨어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김성식은 전국(戰局)이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집과 밭에만 박혀 있으니 도무지 바깥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다. 이두오의 움막에 가는 횟수는 많아졌지만, 갈 때마다 이두오는 별과 우주 이야기나 하려 했지 전쟁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김성식은 이두오야말로 아주 특이한 성향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욱 재미난 것은 이두오가 오히려 자기를 유별난 사람으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셔도 사태는 변하지 않는 일입니다. 전쟁은 그들만의 잔치이니까요."
"이 사람아, 답답하니까 그렇지. 자네는 알고 싶지도 않나?"
"제가 하는 일은 저 혼자서 해도 되는 일이라서 그런지 답답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좋은 망원경이나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조속히 끝나야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법이네."
"물론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별과 우주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겁니다."
"그건 너무 광범위하지 않은가?"
"별은 지구의 모체이고 지구는 우주의 일부입니다."
"알았네. 자네와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인 모양이네."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고맙네. 열심히 하게."
이두오와의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김성식은 소식도 얻어 들을 겸 나가보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학자 이병도의 집이 성북동에 있었다. 성북동이라면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 가면 되는 곳이었다.
이병도와 김상기의 차이점마침 이병도의 집에는 김상기 교수도 와 있었다. 세 사람은 모처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시국과 학자들의 동향을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김성식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군이 북진을 시작했고 모종의 상륙작전 같은 것이 조만간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단파 방송을 듣는 제자 얘기라며 김상기가 입을 열었다.
"맥아더가 김일성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2주 이내로 전쟁을 마치고 응징하겠다고 했답니다. 미군은 비행기로 인민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했으며, 군함으로 조선 해안을 전면 봉쇄했으므로 이북 측이 더 이상 전쟁을 할 기력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국군과 미군은 이미 추풍령을 넘어 영동을 거쳐 대전으로 올라오고 있답니다."
김상기의 말을 받아 이병도가 말했다.
"북쪽 사람들이 앵글로 색슨족이 얼마나 끈질긴 줄을 몰랐던 것이지. 그들은 한 번 잡고 늘어지면 기어이 끝장을 보는 기질이거든."
이병도에 비해 김상기는 보다 현실적이었다.
"인민군이 물러나기 직전 며칠 동안은 피신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과 대한민국이 물러날 때마다 학살을 되풀이했다는 것을 공화국에서 강조하는 데에는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김성식은 대화에서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병도는 대화를 두루뭉수리 로 하며 이쪽 편도 들었다가 저쪽 편도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될 수만 있으면 어물어물 보내며 비상시기를 모면해 보려는 형이었다. 그러나 김상기는 자기 소신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그는 김성식에게 전쟁에 관한 소감을 물었다. 김성식은 자기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뻔한 말씀이지만 첫째 동족상잔이 슬프고, 둘째 미군과 조선 사람이 겨루어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슬픕니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가 나왔다. 호박 풀대죽이었다. 가족들이 호박 장사를 하여 남은 것으로 죽을 쑤어 연명한다는 것이었다.
"시계와 옷가지 등을 팔아 겨우 살아가고 있는데 앞으로 한두 달만 더 계속되면 모두 굶어 죽을 판이오."
말을 마친 이병도는 허허롭게 웃었다.
동족상잔의 책임 누가 져야 하나마침내 9월이 되었다. 김성식은 9월이 주는 어감이 좋게 느껴졌다. 전란의 와중에서 한여름을 살아 넘긴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고, 굳이 꿈으로 말하자면 악몽이었다.
밤에 폭격 소리가 들려 잠을 깼지만, 그의 관심은 휘영청 밝은 달에 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은 소금을 뿌린 듯이 하얀 달빛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는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에는 정말 토끼와 절구 모양의 무늬가 나 있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는 소리 없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는 마음이 울컥 감상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전쟁이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슬픈 것이었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의 전쟁이란 더욱 그랬다. 지난 5년 동안, 일본인이 남기고 간 집과 공장에 그 얼마나 보탰다고 이를 다시 파괴하고 있는가? 그는 죽고 다치고 거지가 되고 있는 이웃과 동포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설령 전쟁이 내일 멎는다고 해도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외적의 침략을 받은 것이라면 울분을 던질 상대라도 있겠지만, 남의 장단에 놀아나서 동포끼리 살육을 벌이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졌다.
세계적으로 좌우의 갈등과 알력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왜 하필 우리가 그것의 가장 혹심한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만백성이 잘 사는 길이라고 염불처럼 공산주의를 외쳤던 좌익 친구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해도 동족끼리의 칼부림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들도 물론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덤빈 것은 아니었으리라. 소련에서 얻은 탱크와 대포로 밀고 내려오면 대한민국이야 단박에 요절을 낼 수 있을 터이고, 미국은 중국에서처럼 손을 떼고 말 것이니, 다소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분열되어 있는 상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통일을 하려면 우리가 주동이 되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내버려두면 남반부는 미제의 밥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들이 정세를 잘못 읽고 경거망동을 하여, 결국은 동포를 도살하고 국토를 초토화하는 것은 민족사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죄악이리라. 그들도 감정이 있는 동물들이라면 지금쯤은 마땅히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사학자로서 그는 행위의 주체로 따져 북측만을 일방적으로 지탄할 수는 없었다. 행위의 동기 유발에 있어서는 오히려 대한민국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 들었다. 대한민국은 하루도 쉴 날 없이 북진을 외치며 주먹을 들어 보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일주일 안으로 평양을 석권할 수 있다는 호언장담을 허구한 날 되풀이했던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요인들이었다. 그는 조병옥이 서울신문에 '북벌단행론'을 당당히 발표했을 때,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릴 줄만 알았지, 어느 누구도 반론을 펼치지 않았던 남한 지식인의 실상을 보고 무력감에 젖었던 몇 달 전 기억을 반추했다.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인민을 몰아붙여 침공을 실제적으로 준비한 반면, 다른 한편은 큰소리만 뻥뻥 쳤지 사실은 전쟁에 대처할 능력조차 없었다는 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