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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어머니 품을 떠나 치열한 경쟁사회에 뛰어든 첫날이자, '사장님' 소리를 듣기 시작했던 1971년 1월 어느 날 군산의 길거리 풍경입니다. 다방에 가면 건달도 사장님, 사기꾼도 사장님, 거지도 사장님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거든요. 

 가게를 개업하던 날 거리풍경. 시계와 카메라를 수리하는 기사가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소식을 몰라 아쉽네요.
가게를 개업하던 날 거리풍경. 시계와 카메라를 수리하는 기사가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 소식을 몰라 아쉽네요. ⓒ 조종안

멀리서 스냅으로 촬영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과 다양한 모습이 렌즈에 잡혔는데요. 도로 위에 비친 긴 그림자가 이채롭고, 거리 분위기도 정감이 갑니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등지고 있어서 그런지 급우들과 쏘다니던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하네요.

사진에는 어린 학생들, 아저씨 아주머니, 일자리 없는 노동자와 10대로 보이는 청소년과 단발머리 소녀 등 20여 명 모습이 담겼는데요. 등장인물들의 옷차림과 난로와 연결된 함석 연통, 아주머니들이 목과 머리에 쓴 수건 등이 지방 도시의 겨울 풍경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40대 중반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측되는 단발머리 시골 소녀와 그녀의 '엄니'로 보이는 아줌마 뒷모습이 가까이 포착되어 눈길을 끄는데요. 목과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과 다양한 포즈의 엑스트라들은 시대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볼수록 재미가 더하는데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삼촌 뒷모습, 개업축하 화환이 가게 입구 양쪽으로 늘어선 '신흥시계점' 간판, 집주인이 운영하던 자동차부속 가게 '역전모터스' 간판, 조용할 날이 없었던 유리점과 여름에 인기 최고였던 아이스케끼집 간판까지 보이니까 재미있을 수밖에요.

 조금 가까이서 찍은 사진인데요. 이렇게 귀한 사진을 남겨준 기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조금 가까이서 찍은 사진인데요. 이렇게 귀한 사진을 남겨준 기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조종안

렌즈가 약간 비켜갔는데요. '역전모터스'라고 쓰인 간판은 이 지역이 어디인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기차역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종합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항상 왁자지껄했거든요. '이리, 전주 직행!'을 외치는 안내양들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10분에 한 대씩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건물만 휑뎅그렁하게 높아졌을 뿐 인기척도 찾기 어려워 아쉬움을 더합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가게 앞이 시골 장날처럼 아침부터 시끄러웠습니다. 열 서너너덧 살 먹은 아이들에서부터 40대 아저씨까지 진미당 앞에 모여 사각 나무통에 아이스케끼를 받아 넣고 어깨에 걸치고 나가며 "진미당 아이스케끼~ 어름요~ 어름과자!"를 외치기 시작했던 장소거든요.  

가게는 중심 도로인 중앙로가 가로지르고, 세무서와 중앙초등학교가 길 건너에 있었고, 시외버스 터미널을 마주하고 있어 위치가 좋았습니다. 저보다 한 살 아래인 기술자와 30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외사촌 동생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지요. 

운이 좋았는지 이듬해 4월에는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큰 가게를 인수해서 이사했는데요. 1년 남짓 운영하는 동안 제가 가게를 자주 비운다며 주인아저씨가 간섭했지만, 별다른 마찰을 빚거나 서러움을 받지 않고 원만하게 지냈습니다. 주인아저씨와 연령차가 많아 항상 조심스러웠거든요.

놀기도 바쁠 한창 때 사장님 되다

대학에서 책과 씨름하거나 남의 집 종업원 노릇을 하면서 놀기도 바쁠 한창 때 가게를 무리 없이 운영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한데요.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오토바이(모터사이클)와 투기·도박 등을 멀리했고, 누구와 다투거나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어른스러운 행동을 했거든요.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믿고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습니다.

 제가 기사에게 부탁해서 찍은 연출사진인데요. 진지한 표정이 일류 기술자처럼 그럴 듯하고, 하얀 페인트 글씨 ‘전자조정기’가 시대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제가 기사에게 부탁해서 찍은 연출사진인데요. 진지한 표정이 일류 기술자처럼 그럴 듯하고, 하얀 페인트 글씨 ‘전자조정기’가 시대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 조종안

  
동네 아저씨가 하던 시계점을 인수해서, 암실을 차려놓고 필름도 팔고, 카메라 수리와 현상·인화도 함께 했습니다. 기술자 봉급은 매월 1만 원, 외사촌 동생은 3천 원씩 지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카메라수리 기술을 배우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되더군요.  

자본금 5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요. 대학등록금이 4-5만 원을 넘지 않았고, 상고 출신 은행직원 초봉이 2만 원도 되지 않았던 때여서 적잖은 금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급 여관 숙박료가 1천 원, 맥주 홀 아가씨에게 3백 원을 팁으로 주면 허리를 굽혀 고맙다고 인사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당시에는 한 달에 두 차례 이상 경찰이 고물상 대장을 검사하러 왔는데요. 후덕한 아저씨도 있었지만, 대부분 트집을 잡아 담뱃값을 뜯어갔습니다. 하루는 세무서 직원이 오더니 겁을 주며 세금 얘기를 하더라고요. 겁이 덜컥 나기에 어른들과 상의했더니 양담배 몇 갑 건네주면 괜찮을 거라고 하기에 알려준 대로 했더니 이사할 때까지 소식이 없더군요. 같은 동네라서 봐줬던 것 같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동창 다섯 명이 있었는데 셋은 전공을 살려 대학에 진학했고 하나는 군에 자원입대했으며 저는 가게를 개업했습니다. 그래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질투심보다 친구들이 자랑스러웠고 저 자신도 긍지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거나 방학 때 친구들이 내려오면 외식비용을 대느라 바빴습니다. 40이 넘어서도 "너에게 얻어먹은 빚은 평생 사줘도 못 갚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으니까요.   

통신시설이 미비했고,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두고 일어난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로 시국이 시끌시끌해서 취직보다는 장사해야 돈을 번다는 인식이 깔려있던 때였는데요. 친구들이 전하는 안부나 부탁을 전하러 부모님을 찾아가면 저에게 "너는 사장이고 월급쟁이보다 돈을 더 버릉게 좋겄다"면서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막내 누님과 함께 지낸 1년

가게에는 살림할 수 있는 부엌과 방 하나가 딸려 있었는데요. 약관의 나이를 갓 넘긴 총각이라서 집에서 형수님이 해주는 밥을 먹고 출퇴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저녁에 문을 닫으면 항상 불안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발시계(탁상시계) 하나도 값나가는 물건이었거든요. 기술자와 외사촌 동생이 있었지만, 계속 맡길 수만도 없는 노릇이어서 신혼이었던 매형과 막내 누님에게 가게에 딸린 집에서 살아달라고 사정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찍은 조카입니다. 지금은 40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 사진도 기사가 찍어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찍은 조카입니다. 지금은 40을 바라보고 있지요. 이 사진도 기사가 찍어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 조종안
경기도 평택에서 직장에 다니는 여 조카도 그곳에서 태어났는데요.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습니다. 깜찍하고 똘똘했는데 벌써 30대 후반이 되었네요. 저보다는 손아래 사람들 얼굴 변화에서 세월의 빠름을 더욱 실감합니다.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집안 텃밭을 가꾸면서 투병 중인 누님을 돌보며 지내는 막내 매형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는데요. 쪼들리는 생활을 하소연하던 선생님 한 분은 서울로 올라가 수백억대 재산가가 되고 딸도 MBC 뉴스 진행자가 되었다고 해서 얼마나 반갑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누님들이나 매형 친구들이 오면 길 건너에 '한산집'에서 술안주로 팔던 돼지 목줄 떼기(목살) 양념구이를 즐겨 먹었는데요. 매콤하면서, 고소하고, 달콤했던 맛이 지금도 입 안에 남아 있습니다. 누님들이 집에서 아무리 기술을 발휘해도 같은 맛을 내지 못해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세를 살지만 후회나 불만은 없어 

저는 군산시 중동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금암동으로 이사해서 중앙로 3가-평화동-영동-중앙로 1가-대명동 1-대명동 2-대명동 3-부산-군산 나포까지 아홉 번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적잖은 횟수이지요. 

집주인 중에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분도 계셨고, 앉은 자리에 풀도 나지 않을 자린고비도 있었으며, 가게 손님을 빼돌려 용돈을 챙기는 얌체 주인도 있었습니다. 훗날 얘기해줘서 알았는데요, 저를 사위로 삼으려다 그만둔 주인도 있었습니다. 웃기지요. 

1971년 1월에 20만 원 전·월세로 시작해서 2002년에 외환위기 후유증으로 빈털터리가 되었고, 지금은 아내가 얻은 2천만 원 전세에서 사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쳇말로 '능력 없는 남편'이지만,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후회나 불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집 장만을 한 번도 못한 것은 아닙니다. 20대 때 단독주택을 두 차례 사서 세를 내주기도 했고, 결혼해서는 아파트를 장만해서 세를 내어준 경험이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가게운영 때문에 방이 딸린 건물을 세 얻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4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아홉 번 이사를 했고, 앞으로 몇 번을 더 다닐지 장담을 못하는 게, 자랑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창피하거나 속상할 것도 없습니다. 가난은 분명히 불편한 것이지만, 그 가난이 죄가 되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세입자이야기’ 응모글



#세입자시절#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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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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