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소설집<순이 삼촌>이 출간되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럴 시대였기에 <순이삼촌>이라는 어린 생명의 출산은 산모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작가 현기영은 '남산'에서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다. 공안 당국은 몽둥이로 전신을 두들겨 팼고, 멍든 몸 위에 싸릿대를 후려 갈겼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집시법 위반죄로 20일간 유치장에 가뒀다.
난산을 통해 태어난 작품, 순이삼촌이듬해 광주의 5월 이후 작가는 다시 학교 수업 도중에 연행되어갔다. 경찰서 대공과에서 4박 5일 동안 수사관에게 시달리며 조서작성에 응하고 나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직후 <순이 삼촌>은 경찰의 요청으로 판금되었다.
당국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순이삼촌>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작품은 60만부 이상이 판매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이로 인해 할 말을 못하고 땅 속에 묻혀 있는 유골들의 한이 조금씩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순이삼촌>을 통해 제주4.3의 아픔이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나오게 되는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순이삼촌>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 벌어진 일명 '북촌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북촌사건은 1949년 1월 7일 당시 함덕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 군인들이 500명 가까운 북촌리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제주4.3 당시 일어난 사건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기록될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남아있다.
당시 사건은 무장대에 의해 발단되었다. 2연대 3대대 군인 일부가 시찰을 마치고 함덕으로 돌아가는 도중 무장대가 군인들을 기습하여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마을 원로들은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들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분노한 군인들은 부대를 찾아온 마을 원로들 10명 가운데 9명을 즉석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군인들은 2개 소대 병력을 풀어 북촌마을을 덮쳤다.
북촌사건, 광기와 야만의 증거군인들은 주민 모두를 초등학교에 집결시키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총을 장전한 채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고, 현장에서 주민 7~8명을 즉결 사살했다. 그리고는 군경가족이나 민보단 가족을 주민들에서 분리시켰고, 이런 군인들의 조치에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한편, 지휘 장교들은 대대장이 임시로 타고 온 앰블런스 안에서 주민들을 처리할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즉석회의를 열었다. 그때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본 경험이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니, 적을 사살하는 경험을 쌓을 겸 몇 단위로 가서 총살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에 있는 당팟과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끌고가 총살을 시작했다. 총성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500명 가까운 주민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멈췄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도 이름을 짓거나 호적에 올리는 등의 일을 미루던 시기였기에, 유아 대부분이 이름이 없던 시기다. 피해자 수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이유다.
제주도에서는 먼 친척이나 이웃 어른을 그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 현기영의 소설에서 '순이 삼촌'은 가공된 인물로 주인공과는 먼 친척인데다 고향에서는 가까운 이웃으로 살던 사이였다.
소설 속의 '순이삼촌'순이삼촌도 북촌사건 당시 군인들에 의해 총소리 통곡소리가 진동하는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순이삼촌이 현장에 끌려갔을 때 사람들은 밭에 안 들어가려고 밭담 위에 엎어져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순이삼촌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직전에 실신해서 넘어졌으므로 총탄을 피할 수 있었고, 깨어났을 때는 그의 몸은 시신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구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였던 옴팡밭은 순이삼촌네 소유였다. 사건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옴팡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을 빌어 시신을 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 수 있었다.
북촌사건이 발생했던 1949년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지만, 옴팡밭에는 죽은 시신을 먹은 고구마들이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친척 어른이 당시를 회상하는 증언이다.
"그핸 숭년(흉년)이라, 보릿겨범범 먹던 때지만 그 아지방네(아주머니네) 밭에서 난 감저(고구마)는 사름(사람)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사람)들이 사먹질 않했쥬."
순이삼촌이 그 옴팡밭에서 김을 맬 때면 호미 끝에서 시신의 뼈나 납탄환이 30년 동안 끊임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리고 조용한 대낮이면 주위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는 환청이 자주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이 그럭저럭 당시 고통을 잊고 살았건만, 순이삼촌만은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는 가운데 자신이 평생 일궈먹었고, 자신을 평생 옥죄던 옴팡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 옆에는 그의 자살을 암시하는 약봉지가 뒹굴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작품의 주인공이 내린 결론이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간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참극을 증언하는 너븐숭이 유적지북촌리 너븐숭이에는 북촌사건 당시 희생당한 아기들의 무덤 20여 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참극을 느끼게 한다. 또 비극의 현장이었던 옴팡밭에는 작가 현기영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순이삼촌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 주변에는 시신을 상징하는 돌들이 어지러이 널려있고, 그 돌들마다 소설 <순이삼촌>에 나오는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너븐숭이 남쪽 바다가 보이는 앞에는 피해를 당한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위령비에는 피해를 당한 주민들 중 확인된 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너븐숭이 서쪽 입구에는 '너븐숭이 4.3기념관'이 건립되어 최근에 개장되었다. 기념관은 제주4.3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자료실로 이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독재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제주4.3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작가 현기영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문학관으로도 겸용될 예정이다. 이 기념관에는 작가가 <순이삼촌>을 쓰기 위해 북촌일대를 누비며 주민들의 증언을 담을 때 사용했던 녹음기와 소설의 초판 및 영문판 등이 자료로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