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현의 눈에 미국 <라이프> 지의 지질과 활자는 우수해 보였다. 반면 조국에서 발간하는 <인민보>는 견주기가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고 거칠었다. <인민보>에서는 '빛나는 민주개혁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 그것을 믿는 남반부 인민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인민공화국의 최대 약점은 말만 요란하고 풍성하다는 것이었다. '8시간노동제'니 '균일임금제'니 '노동보험제'니 '임산부특별보호제'니 하는 것들이 지금 날아드는 포탄 아래에서 하루 한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인민들에게 먹혀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전쟁의 와중에서 군수(軍需) 이외에 움직이는 공장이 어디 있다고 8시간 노동제를 말하고 있는 걸까? 뭐가 급하다고 토지개혁은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개혁도 좋지만 날아드는 포탄과 당장의 굶주림이나 없도록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인민보>에서 말하는 대로 '이제 땅을 얻었으니까 내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미 아들은 물론 딸들까지 전장으로 내몰지 않았던가?
조수현은 <인민보>에 사진까지 함께 실린 '식량돌격운반대' 기사를 생각했다. 경기도 여주군의 농민들이 강도 미제와 그 주구 이승만 괴뢰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그들을 하루바삐 격멸하기 위해 자기들이 우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궁리한 결과, 식량을 모아서 서울에 나르기로 했다.
그들은 열세 살 어린이부터 젖먹이를 업은 여인들 그리고 70 노인에 이르기까지 쌀 두세 말씩을 지고 여름 뙤약볕을 견디며 2백 리 길을 걸어 서울에까지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으나, 이 사람들은 그럴수록 더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이 일어 그들을 결단코 무찔러야 한다는 결의를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조수현은 스스로 민망하고 계면쩍었다. 광적인 열성분자가 쓴 기사이겠지만, 그래도 자랑할 게 따로 있지, 이런 것을 자랑이라고 늘어놓는 인민공화국의 수준에 그녀는 맥이 풀렸다. 이런 기사를 읽고도 인민공화국을 좋은 나라라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미상불 식민지 시대의 신문도 이보다는 나았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인민공화국의 신문에는 인간의 체취가 전혀 없었다. 먼저 상단에는 정부의 공시 사항이 아주 큰 활자로 판에 박은 듯이 실렸다. 그것은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의 결의사항이었다. 의장 김두봉과 서기장 강양욱의 이름은 김일성 다음으로 자주 나왔다.
<인민보>에는 김일성 장군 말씀, 김일성이 소련 위성국 원수와 나눈 메시지, 스탈린 대원수에게 바치는 찬사, 용사의 무공담, 영웅 칭호, 훈공 제정,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적 성공, 자본주의 나라의 파업과 데모 등이 늘 판에 박은 듯이 담겨 있었다. <인민보>는 언제나 진선진미한 정치를 예찬하고 이에 대한 최대한의 찬사와 송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수현이 점령지에서 보고 듣고 겪는 실상은 신문의 내용과는 격단의 차이가 있었다.
다시 책상에 앉은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턱에 괴었다. 그녀는 이두오를 떠올렸다. 그에게 별과 우주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제 그녀의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내려서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러시아 화가 유리 카키치프의 화첩이 있었다.
그녀는 한 장 한 장 유심히 그림들을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조약돌과 불가사리를 담은 그림이 나왔다. 그녀는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이색적인 풀과 나무가 담겨진 수채화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장을 넘겨보았다. 수초와 실과수 사이에서 여인들이 꿈같은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거기에는 폭포수에 머리칼을 맡기고 있는 여인의 미묘한 누드가 웃음 짓고 있었다.
평면동물
조수현은 어젯밤 이두오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두오는 그녀에게 난데없이 투명인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현씨, 투명인간 이야기 들어 보셨지요? 누구든지 네 번째 차원, 만약 시간을 네 번째 차원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는 다섯 번째 차원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모습은 일반인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반면 그는 일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신이나 도깨비들이 할 수 있었던 기상천외한 일들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투명인간이 소개된 것은 소설을 통해서입니다. 소설 <투명인간> 이전에 <평면세계>라는 소설도 있었습니다. 2차원 평면 우주에 사는 생명체의 이야기입니다. 2차원 생명체들은 평면이 세상의 전부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지난 번 얘기했던 연못의 잉어가 연못 안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잉어들이 연못 밖의 세상을 생각하지 못하듯이, 평면 생명체들은 세 번째 차원을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평면 세상의 한 과학자가 차원을 이탈하는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는 평면으로부터 불과 몇 센티 뛰어올랐지만, 삽시에 그의 모습은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2차원 세계에서 빛은 오로지 평면을 따라서만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과학자는 세상 위에 떠다니면서 2차원의 세상을 거의 전능한 관점으로 조감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이런 일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차원 하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더라도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탈옥이 가능합니다. 2차원 세계의 감옥이란 언제나 닫힌 선 안에 인간을 가두는 것이므로 평면 위로, 다시 말해서 3차원의 세상으로 솟구치기만 하면 그는 얼마든지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투명인간>이나 <평면세계>나 똑같이 차원의 이치를 소설에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3차원 세계의 생명체는 4차원의 입장에서 볼 때 평면 세계의 미물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라고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지만, 한 차원만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우주가 4차원의 성격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빛은 3차원 공간만을 거쳐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3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가들은 2차원의 평면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단순세포의 미물들입니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미물들의 앞에 서 있는 새끼 줄반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2차원의 생명체는 몸도 평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평면 동물이 주제 파악을 못하고 3차원의 음식물을 먹는다고 해 봅시다. 입으로 들어간 음식물이 몸을 통과해 항문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피를 갖고 있는 그 음식물은 평면 동물의 몸을 2등분으로 쪼개 버릴 것입니다.
오늘의 전쟁이 마치 그런 형국입니다. 이 평면 동물은 차원 높은 음식에 눈이 먼 나머지 제 몸을 기어이 둘로 쪼개고야 말 짓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이 항문으로 나와 몸체가 완전히 나누어져야 이 전쟁은 끝이 날 것입니다. 몸이 갈라지고 있으니 그 내상(內傷)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핏줄이 터지고 장기는 모두 손상될 것입니다. 분열된 신체에는 구석구석 퍼런 멍이 들 터이고,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용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의용군으로 나갔던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손이 달아나 버린 소년, 다리를 저는 청년,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장년 등 그들은 하나같이 참담한 몰골로 귀향했다.
은혜병원의 오현자는 박미애와 함께 환자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들은 모두 낙동강 부근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치료도 변변히 받지 못한 몸으로 5,6백리 길을 걸어 왔다고 했다.
"그래도 돌아온 우리는 나은 편이죠. 부상이 심해서 오지 못하는 사람, 실종된 사람, 죽은 사람에 비하면 우리는 운이 좋은 겁니다."
주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부상자 중에는 박미애를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불구가 되어 돌아온 그를 박미애가 눈물겹도록 따뜻이 보살핀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람과 기계가 싸우는 것 같아.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지탱하지 못할 거야."
"미국 놈들이 나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오현자까지도 무고한 인명을 미군의 대포나 비행기 밥으로 만드는 인민공화국을 선선히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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