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녹색 잎 새가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 4월의 끝자락, 산골짝마다 신록 축제가 한창이다. 며칠 전부터 신록 사이로 봄날의 가객(歌客) 소쩍새 날아와 초여름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초록 숲에 붉은 피를 토할 때마다 배꽃송이들이 흩날려 몸을 푸느라 정신이 없다.
배꽃, 눈이 부신 한낮엔 순수가 쏟아질 듯하고, 바람이라도 일렁거려 겉옷을 쥐어짜면 옥양목 모시적삼냄새가 배어날 것 만 같다. 오늘밤처럼 배꽃에 달빛이 부서지고 소쩍새 피나게 울어 산속을 헤매기라도 한다면 은하수 별똥들이 뚝뚝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특히 배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조선 중엽 부안 명기(名妓) 매창(梅窓)의 시를 읽고서부터다. 더구나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하필이면 유희경, 윤희경과 비하면 이름이 비슷해 그들 틈새에 끼어 이별과 정한의 공감을 함께하고 있는 듯해서이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출전<가곡원류> 매창시비 전문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의 꽃비, 배꽃이 가랑비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애상적 정서, 그냥그대로의 푸른 봄비. 시간이 꽤나 흘러버린 공간 추풍낙엽, 임과의 까마득한 정감의 거리 천리, 외로운 꿈과 어울려 그리움이 절절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유희경(劉希慶)이 남도를 여행하던 중 매창을 만나게 된다. 천민이며 서얼 출신 유희경은 40대, 기생 매창은 꽃다운 18세였다. 유희경은 시와 예문(禮文)에 뛰어났고 매창은 시와 거문고에 능란한 솜씨가 있었다.
만나는 순간부터 문학의 공통분모를 확인한 두 사람은 흩날리는 배꽃처럼 몸과 마음이 쏜살같이 무너져 내렸다. 평소 여색을 멀리했던 유희경은 파계(破戒)의 나락으로, 기생 매창은 열여덟을 지켜온 꽃다운 수절(守節)을 꺾어버리고 머리를 올려버렸던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갈 길이 바빴던 유희경은 상경하여 의병을 조직, 전쟁터를 헤매느라 다시는 매창을 만나지 못했고 매창은 수절하다 거문고의 열두 폭 속으로 한 송이 배꽃 되어 이생을 마감했다.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이미 주신 은정까지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매창 <증취객-취한 손님에게 드림> 전문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네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때면 애가 끊기네
-유희경 <촌은집> 전문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했고, 오래전 역사 속 인물들의 이별이야기지만 비를 맞으며 함초롬히 서있는 배꽃 매무새가 오늘따라 더욱 애처롭다. 봄비가 흩뿌리고 지나간 자리, 소쩍새는 오늘 밤도 꽃다운 나이의 세상을 떠난 매창의 천년세월을 찾아 붉은 피를 토하며 고달픈 영혼을 달래고 있다.
나도 봄 농사가 끝나는 대로 김제평야를 거쳐 변산반도를 돌아보고, 매창이 묻혀있는 부안읍 남쪽 공동묘지를 찾아가 그녀의 거문고 가락을 듣고 오자면 지금부터 서둘러 배낭을 꾸려야할 것이다. 오늘처럼 배꽃이 무너져 눈이 부신 날에는 '순수한 사랑과 이별'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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