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정확한 전황이 알고 싶어 켠 라디오인데, 뜬금없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식을 국군으로 내 보낸 어머니가 아들에게 인민군으로 귀순하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누이가 오빠를 부르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빠! 우리들은 인민군의 보호 아래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오빠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인민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고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때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인민의 편으로 돌아오십시오. 인민공화국은 두 손을 들고 오빠를 맞이할 것입니다."
방송은 갈수록 상투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방송을 들으면서는 가슴이 미어졌다.
"당신이 인민의 적이 되어 이승만 괴뢰도당의 편에 있음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덕화는 아빠를 대신하여 속죄하겠다고 의용군을 지원해 나갔습니다. 나는 밤마다 당신과 덕화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잠을 깹니다. 그러고는 밤을 하얗게 지새웁니다. 돌아오소서. 하루 바삐, 인민의 편으로 돌아오소서."
상황으로 보아 남편은 국군의 장교로 나가 있고 처자는 인민공화국에 남아 하루하루를 보내다 마침내 딸이 의용군으로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집안이었다. 그러자 결국은 부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참으로 상상치도 못했던 기구한 슬픔과 불행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느덧 조수현의 눈언저리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편지다음 날 밤 배 향기를 사이에 두고 이두오와 조수현은 너럭바위에 앉아 있었다. 남방셔츠로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가을밤의 냉기는 조수현의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두오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두오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다소곳이 감싸 안았다.
초가을 밤하늘의 별들은 마치 쏟아질 듯이 가까이 내려 앉아 있었다. 아무리 별이 있고 배 향기가 나고 이두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눈짐작만큼이나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대포 소리는 그녀의 마음에 불안의 연기를 지피고 있었다.
"두오 씨, 아직도 더 들어야 할 별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두오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환한 달빛을 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미세한 별빛을 걸치고 있는 눈썹은 불안정하게 파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별 이야기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이제 불과 며칠이면 이두오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들도 사실은 아주 불안정한 상태랍니다. 실제로 별은 반짝이지도 않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별빛이 대기에 의해 교란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대기가 없는 우주 공간으로 나가면 별은 맥없이 퍼진 흐물흐물한 영상에 불과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나요?"
"뉴턴 시대의 밤하늘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럼 그때 이야기를 해 보세요."
"뉴턴 시대에는 인간의 관찰이 태양계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자연과 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질서 정연하고 우아했습니다."
"그렇다면 옛날이 더 평온했겠네요?"
"수현 씨는 태양계의 행성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 외웠어요.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두오는 하늘을 가리키며 눈에 보이는 태양계의 별들을 조수현에게 알려 주었다.
"그 시대에 생명체의 탄생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지요. 우주 전부가 인간을 위해 배려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달과 태양과 다른 여러 행성들이 오로지 지구의 생명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시절에 인간은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졌겠습니까?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달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달은 지구의 공전 궤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적절한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달이 지금보다 작았더라면, 지구의 자전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수억 년 동안 누적되어서 커다란 기상 변화를 초래했을 터이고, 이 대재난의 와중에 모든 생명체는 멸종했을 것입니다.
달은 지구 크기의 삼분의 일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DNA가 생성되려면, 수억 년 동안 안정된 기상 상태가 지속되어야 하므로, 만약 저 크기의 달이 없었더라면 생명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달이 적절한 크기와 거리를 유지해 주었기에, 지구의 생명체는 재앙 없이 진화를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달은 적절한 기상 환경 말고도 우리 인간에게 주는 혜택이 더 있습니다. 만약 달이 없다면 달님도 없고 토끼와 계수나무도 없겠지요. 달이 없었더라면 시인의 소재는 아주 빈곤해졌을 겁니다. 우리는 이태백이나 소동파를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달이 없으면 프로포즈하는 방법도 달라졌을 겁니다. 서양 같으면 달의 광기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늑대인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달이 없으면 새와 고래와 삼나무가 가장 먼저 없어진다고 합니다. 달이 없으면 달(Month)도 없어집니다.
수현씨도 알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태양입니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는 절묘하게 조절되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거리가 1억5천 만 km를 유지해야 지구의 밝기와 온도가 유지됩니다. 바닷물이 액체 상태를 유지하면서 생명체 탄생에 필요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려면 지금 이대로의 태양이 반드시 있어 주어야 합니다."
조수현은 이두오의 이야기에 아름답게 취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지구는 너무나도 많은 요인들이 적절하게 세팅되어 있는 행운의 행성입니다. 이처럼 운 좋은 행성이 우주에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뉴턴 시대에는 조물주가 인간을 각별히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행운을 안겨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많은 것들 중 단 하나만 없어지더라도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는 대포 소리의 근심도 잊혀 있었다. 조수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은하수를 찾아냈다.
"또한 은하계가 없어진다면 달이 없어지는 것 이상으로 시인들이 빈곤해질 것이에요."
"맞습니다. 저는 얼마 전 김성식 선생과 술을 마시면서 <푸른 하늘 은하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실 그 노래의 제목은 <반달>이에요."
"그런가요? 반달과 은하수가 다 나오는 노래군요."
"은하수가 나오는 노래로는 이런 게 있어요. 내가 여고 시절에 외웠던 시에요."
조수현은 손가방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그녀는 이두오가 처음 보는 시 한 편을 적어 주었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요?"
그녀는 이두오에게 부질없는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 자신을 의식했다. 해 놓고 보니 그것은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나는 수현씨가 인민군이 아니고 국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나는 두오씨가 대한민국 백성이 아니고 인민공화국 백성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두 사람은 함께 힘없이 웃었다.
조수현이 돌아간 후 이두오는 그녀가 남기고 간 종이를 꺼내 읽어 보았다. <귀촉도>라는 제목의 시가 거기 있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 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