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후기에는 당쟁으로 혼란이 가속화되던 시대였다. 더욱이1575년 선조 8년에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시작된 당쟁은 선조 24년에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짐으로서 서인·북인·남인의 3색 당쟁으로 변했고, 1683년 숙종 9년에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함으로서 노소남북의 4색 당쟁으로 변천하였다.
이러한 당쟁으로 덕망 있는 학자, 선비들이 때 아닌 피해를 보기가 일쑤였다. 특히 노론의 장기집권으로 향리의 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대부분 화를 면하기 위해 은둔생활에 들어간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식산 이만부 선생이 그러했다.
서른넷 나이로 벼슬을 벗어던지고 향리에 칩거한 이만부 선생. 물론 그는 벼슬에 물러가기 전까지 조선을 이끌 새로운 인재 중의 하나였다. 연안 이씨 출신인 이만부 선생은 대대로 일곱이나 대제학을 배출했으며 조부와 부친은 이조판서, 예조참판을 지냈으니 덕망있는 가문이었다.
그 일화로 숙부와 함께 낙향을 하는 이만부와 숙종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숙종은 그들의 낙향 결심이 확고부동한 것을 알고 넌지시 이런 농담을 했다.
"
그대들이 영남으로 낙향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영남에 그대 집안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 몇이나 될까?""성은이 망극하오나, 조령을 넘으면 버들잎과 오얏뿌리가 발에 걸릴 듯하옵니다."이만부 선생의 숙질의 대답인지 예조참판 이옥의 대답이었는지 석연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으나, 버들잎은 유서애의 풍산 유씨 네를, 오얏뿌리는 퇴계의 진성이씨 네를 이른 말로 그만큼 가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쟁이 심한 그 혼란시기에 살았던 이만부 선생은 벼슬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만부 선생은 어릴 적부터, 부조가 관직에 있다보니 어떨 수 없이 당쟁에 휘말려 일회일비하는 실상을 목격해 온 나머지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애시당초부터 과거를 마다하고 오직 학문 도야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나이 약관을 넘어서자 전국의 명산을 찾아 슬기로운 의기를 기르고, 선현의 유적지를 심방하였다.
천운정사에서 학문을 벗 삼다 이만부 선생이 평생 살았던 경북 상주. 그곳은 예부터 '삼백'의 고장으로 쌀과 누에고치, 곶감으로 유명했다. 그중 지금도 상주곶감은 예나 지금이나 명품으로 치며, 관광객들이 한번씩 그곳을 가면 꼭 곶감을 맛보거나 사오곤 한다. 그런데 쌀과 누에고치는 이해가 가지만 곶감은 왜 삼백일까,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아마도 추측 건데 원래 감이야 붉지만 곶감이 되면서 즉 말리면서 흰 분으로 뒤덮여 있다보니 삼백의 하나가 된 듯싶다.
서른넷 무렵에 안동으로 낙향하기로 결정한 숙부 이협과 함께 영남 땅으로 옮길 작정을 하고 상주를 마음에 뒀다. 그런 그가 상주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지리적 여건으로 윤택한 삶을 살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상주는 너른 논을 구경하기 쉽지 않은 경상도 북부 내륙지방과 달리 논이 있다. 또 낙동강이 흘러 일찌감치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고대 사벌국의 도읍지였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상주의 번영이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점을 이만식 선생 또한 관가하지 않았을 터.
그렇게 내려온 이만부 선생은 논실(외답동)에 터를 잡고 '식산정사'라는 당호를 붙이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이만부 선생의 서재였던 '천운정사' 이 남아 이만식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천운정사는 이만부 선생이 1700년경에 건립한 곳으로 선생이 지은 정사 중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다.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1990년 7월 상주시에서 보수하였다.
이만부 선생은 주자의 시구 중 "반무방당일감개(半畝方塘一鑑開)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인용하여 '천운재(天雲齋)'라 하였다. 특히 이 집은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크다.
ㄱ자집 건물로 2칸의 마루방과 2칸의 온돌방, 1칸의 부엌이 있으며, 마루방은 천운당(天雲堂), 온돌방은 양호료(養浩寮)라 하였다. 3량구조(三樑構造)에 홑처마집인데 천운당의 지붕은 맞배지붕, 양호료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점이 특이하다. 정사의 앞에는 조감당(照鑑塘)이라 이름한 방형의 연당(蓮塘)이 있으며 식산이 지은 <노곡기(魯谷記)>에 이곳의 전체 구성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집을 짓고 낙향한 이만부 선생. 그곳에서 마음껏 자신의 학문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언젠가 쓴 시 '새재를 지나며(過鳥嶺)'에서 '번거로운 세속 일, 헌옷 벗듯 벗어 던졌다'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만부 선생은 식산정사에 머물며 여러 선비들과 교류를 통해 학문을 나누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13종 38책이나 되는 걸 보면 그가 왜 평생 상주에 머물러야 했는지는 가늠케 한다. 또한 그 사이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행록(地行錄)>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기행문으로서 가치가 높다. 장백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지방에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손수 돌아보고 쓴 놀라운 저작이다.
그 가운데서 금강산의 바위들을 묘사한 아래 대목은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나다.
"꼿꼿하게 선 것, 비스듬히 누운 것, 세로 선 것, 가로지른 것, 둥근 것, 모난 것, 길쭉한 것, 얼굴을 맞대고 선 것, 울룩불룩하게 솟아오른 것, 한 무더기로 거대한 군락을 이룬 것, 아웅다웅 성이 나서 다투는 듯한 것, 굽어보는 것, 우러러보는 것, 반듯이 누워 되돌아 보는 듯한 것, 뛰어오르며 공중으로 발길질하는 듯한 것, 엎드려서 하소연하는 듯한 것, 벌떡 일어나 말다툼하는 듯한 것, 춤추고 웃고 성난 듯싶은 것 들이 모두 금강산 바위에 관한 것들이다."그런 그는 이밖에도 <역통대상편람(易統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講目)>, <노여어(魯餘語)> <도동편(道東編)> <식산문집(息山文集)> 등이 있다. 또한 외국에 대한 견문도 상당해 조선시대의 최고의 학자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런 이문부 선생은 권세 있는 집안의 가문의 자식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권력의 실체를 보고 자라 세속을 멀리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던 참 선비였다. 권력에 휩쓸려 당파의 이익에 눈이 멀지 않고 낙향하여 청렴한 삶을 산 그의 향기가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상주는 고대 사벌국의 도읍지로서 옛 왕릉과 관련한 유적을 많이 지니고 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상주박물관은 이런 상주의 문화적 향기를 한데 담았다. 이곳에는 민속생활유물 1천500점, 고고유물 250점, 역사자료 130점, 고서적 50점, 기타 501점 등 모두 2천431점의 역사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개관시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 관 일:1월 1일과 매주 월요일
입 장 료: 어른 1천원, 청소년 500원
문 의:상주박물관 054-536-6160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부정부패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청렴여행] 연재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시작한 작은 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바랍니다. 앞으로 [청렴여행-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