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미국 워싱턴 현지 시각)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났다. 이날 최 위원장은 지난 2007년 대선과 관련된 발언으로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대 어느 대선보다 돈 적게 드는 선거운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선거운동 당시 우리는 100대 그룹으로부터 진짜 단돈 1만원도 받은 적이 없다. 전에는 당선사례금 같은 것도 있었지만 이번엔 하나도 받지 않았다."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는 "대선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정권"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자부심과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최시중 "MB가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선거운동 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는 최측근의 발언은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 발언을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또다른 정권 실세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연결시킨다.
여기에는 이 대통령이 대선 때마다 되풀이된 '정경유착'이라는 과거의 관행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천 회장 등 자발적 후원자들의 지원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담겨 있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중인 대검 중앙수사부가 '물러난 권력'에 이어 '살아있는 권력'인 천 회장을 둘러싼 의혹들도 수사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미 4월초 천 회장을 출국금지한 상태다. 그런데 검찰은 수사 범위를 "박연차 회장과 관련된 부분"으로 한정했다. 이는 2007년 대선자금과 관련된 의혹들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태도로 비친다.
천 회장을 둘러싼 의혹은 크게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전(2007년)과 이후(2008년)로 나뉜다. 전자는 이 대통령의 경선·대선자금과 관련된 의혹이고, 후자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된 의혹이다.
검찰의 칼끝은 전자보다 후자를 겨냥하고 있다. 검찰이 5일 지난해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했던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전격 압수수색한 것도 이러한 기류를 반영한다. 조만간 천 회장의 소환조사도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2007년 의혹] 왜 보유주식을 대량으로 매각했을까?
천 회장은 17대 대선이 치러진 2007년에만 세중나모여행의 보유주식 212만여주를 185억여원에 팔아치웠다(관련기사- 천신일 일가, 2007년 보유주식 대량 매도한 이유는?). 이는 그의 자녀와 계열사가 매각한 주식까지 포함된 수치다. 일부에서는 당시 현금화한 주식매각대금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하고 있다.
특히 천 회장과 그의 자녀들이 131만여주(122억여원어치)를 팔아치운 시기는 2007년 4월과 5월, 11월 등으로 이는 한나라당 경선이나 대선 본선과 겹친다. 게다가 천 회장의 주식매각대금 일부가 당시 이명박 후보의 특별당비(30억원) 대출 담보로 이용됐음이 드러났다.
자신의 건물을 담보로 특별당비를 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후보가 '예금-근저당 설정-예금담보대출'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특별당비를 마련했는지 여전히 의혹이다. 또 2007년 대선 당시 박 회장이 천 회장에서 수십억원을 건넸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천 회장은 2007년 대선 당시 이 후보의 '막후 후원회장'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 캠프의 '조직'과 '자금'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백억원에 이르는 주식매각대금과 박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이 후보의 경선자금이나 대선자금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천 회장은 주식매각대금 현금화 의혹과 관련 5일 "현금화했다는 보도가 있던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주식 매각대금의 경우) 법인은 법인계좌로 들어갔고 개인은 개인계좌로 다 들어갔다"고 부인했다.
[2008년 의혹]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나섰나?
현재 검찰이 좇고 있는 '천신일 의혹'은 박연차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돼 있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도 6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압수수색이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과 관련이 있다고 인정했다.
국세청이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31일. 비슷한 시기에 천 회장과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등이 모처에 모였다. 이들은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검찰고발로 이어질 경우 정·관계 로비의혹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회장은 '박연차 대책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다. 천 회장은 "박 회장이 세무조사를 받는데 인간 정의상 어떻게 안갈 수 있느냐"며 "'형님 도와주이소'라고 하면 내가 '알아볼게' 이 정도로 얘기한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천 회장은 '박연차 대책회의'에 참석한 지 한달 후인 8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 회장을 만나 원화 2000만원에 해당하는 위안화를 받았다. "박 회장으로부터 10원 하나 받은 적 없다"던 자신의 주장을 뒤집은 셈이다. 하지만 천 회장은 박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선수단과 응원단의 격려금 명목으로 돈을 건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박 회장이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한 뒤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결국 입국한 것을 두고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 천 회장의 역할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박 회장은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베이징 만남 이후 한달 만인 9월 말에 천 회장이 박 회장에게 10억원을 건넸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검찰이 박 회장의 계좌에서 10억원의 뭉칫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포착하고 계좌추적을 했더니 이 돈이 천 회장에게 전달됐다는 것이다.
박연차 대책회의 참석(7월)→ 베이징 만남-2000만원 수수(8월)→ 10억원 수수 의혹(9월) 등은 모두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결국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진행된 7∼11월까지 천 회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박 회장과의 돈 거래가 있었는지 등에 검찰수사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세무조사 무마 로비 받았던' 이상득·정두언도 소환할까?
한편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에는 여권의 실세인 이상득·정두언 한나라당 의원도 등장한다. 박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관이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관련 이들과 직접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향후 이들의 소환여부도 관심거리다.
또 박 회장의 사돈이자 '박연차 대책회의'에 참석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이 지난해 7~10월 국세청 고위간부 2~3명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국세청 간부들을 소환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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