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슴남자> 겉표지
<사슴남자>겉표지 ⓒ 작가정신
어느날 사슴 한 마리가 다가와서 자신에게 말을 한다. 그것도 인간의 말을. 사슴이 하는 그 말은 자신에게만 들리지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미쳐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신경쇠약을 만들고, 그것이 환청과 환각을 초래할 수도 있을테니까.

좀저 진지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해도 마찬가지다. 백보 양보해서 사슴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을 만큼 영리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말을 할 수는 없다. 사슴의 구강 구조로는 사람의 말을 발음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황당한 일도 소설에서는 가능해진다. 그것이 판타지 소설이라면 더더욱. 마키메 마나부의 2007년 작품 <사슴남자>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

대학원에 다니는 28세의 주인공은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나라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에 물리 담당교사로 근무를 시작한다. 지도교수가 주인공에게 "자네는 신경쇠약이니까"라고 말하면서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다며 제안한 것이다.

나라의 여자고등학교로 떠나는 주인공

주인공은 얼떨결에 이 제안을 수락하고 사슴이 많은 유서깊은 도시 나라로 떠난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물리교사의 일을 제대로 수행해서 자신이 신경쇠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꼬여만 간다. 예민한 여고생들과는 매일 티격태격하고 동료 선생들도 자신을 동정하는 것만 같다. 한 술 더 떠서 숲에서 만난 사슴 한 마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 처음에는 사슴이 자신에게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다음날 우연히 만난 사슴은 다시 주인공에게 말을 한다. "어제는 어째서 도망쳤지?"라고 따지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져 간다고 생각한다. 신경쇠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라에 왔건만, 이곳에서 자신이 신경쇠약이라는 것을 제대로 입증한 셈이다. 계속해서 사슴은 놀랄 만한 이야기를 주인공에게 해나간다.

최근들어 일본에서 지진이 잦아지고 있고 후지산의 움직임도 심상치않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커다란 재앙이 세상을 덮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땅 속에 있는 커다란 메기 한 마리가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메기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한데, 그것을 여우에게서 받아오라고 주인공에게 '명령'한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주인공에게는 헛소리처럼 들릴 만한 이야기다. 지진은 지하에 있는 판의 이동이 지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절대로 메기가 몸부림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메기는 물고기인데 땅속에 산다니?

이때부터 주인공의 좌충우돌이 시작된다. 사슴은 그에게 운반책으로의 표식을 남기고, 주인공의 얼굴은 조금씩 사슴으로 변해간다. 처음에는 머리에서 사슴귀가 나타나더니, 이어서 코가 사슴코로 변하고 뿔도 자라기 시작한다. 사슴은 그것을 빌미로 주인공을 협박한다. 원래의 얼굴을 되찾고 싶으면 여우에게서 '눈'을 받아와, 안 그러면 세상은 망해.

주인공은 어떻게 눈을 되찾을 수 있을까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세상을 구하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다. <사슴남자>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밑도 끝도 없이 눈을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변한 얼굴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변해가는 외모는 오직 자신만이 바라볼 수 있다.

주인공은 눈을 되찾기 위해서 10년 만에 다시 검도를 시작하고, 오사카와 교토를 오가면서 여우의 정체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학생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좋아지지만 어떻게 생긴줄도 모르는 눈을 가져오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다소 코믹하고 황당한 설정이지만, <사슴남자>의 구성은 탄탄하다. 일본에 전해오는 각종 민담과 전설, 오래된 왕국의 이야기를 한데 뒤섞고 있다. 주인공은 역사에 해박한 동료교사의 도움을 받고, 일본인들이 섬기는 수많은 신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눈에 대해서 추리해나간다.

<사슴남자>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린 판타지기도 하다. 초반에 왜 주인공이 학생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포함해서, 앞부분에 깔아놓은 모든 복선과 단서가 마지막에 밝혀진다. 거기에 새로 부임한 주인공의 심리와 생기있는 여자고등학교의 풍경, 체육대회의 긴장감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문외한인 독자라도 흥미를 느낄 만하다. 인간이 사슴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작품 속에서 사슴은 자신을 가리켜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라고 말한다. <사슴남자>를 다 읽고나면 동물원의 사슴들을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사슴남자> 마키메 마나부 지음 / 권일영 옮김. 작가정신 펴냄.



사슴남자 - The fantastic Deer-Man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일영 옮김, 작가정신(2009)


#사슴남자#판타지 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