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가지러 왔습니다."
12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역사 2층에 위치한 파리크라상 매장. '베이커리 카페'답게 향긋한 커피와 달콤한 빵 냄새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 점퍼 차림의 박병규(68) 용산푸드뱅크(Food Bank) 실장이 들어서자, 점원들이 일손을 멈추고 반갑게 그를 맞았다.
한 점원이 빵 진열대 커튼을 젖히자, 바구니에 빵이며 샌드위치가 수북이 쌓여 있다. 전날 만들어 판매하고 남은 것들이다. 박병규 실장은 가지고 온 봉지에 부지런히 빵을 담았다. 박 실장의 빵 담는 일을 도와주던 점원이 "샌드위치는 따로 담아서 냉장 보관 해주셔야 하구요…"라며 주의사항까지 꼼꼼하게 일러줬다.
금세 대형 봉지 두 개가 100여 개의 빵으로 가득 찼다. 가격이 비싼 빵들이어서 50~60만원어치는 족히 되는 양이다. 적을 때는 한 봉지, 많을 때는 네 봉지도 가져간다고 한다.
'왜 빵을 주느냐'는 질문에 한 점원은 "어제 생산을 해서 고객들에게 판매하고 남은 빵과 샌드위치들인데, 불우이웃을 돕거나 좋은 일에 쓴다고 해서 매일 챙겨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날 만들어진 빵은 다음날 상품으로 팔 수 없을 뿐이지, 제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서울에만 결식아동 2만9643명빵을 모두 담아 든 박병규 실장은 서둘러 매장을 빠져 나왔다. 아직 빵을 가지러 들러야 할 매장이 6곳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하루에 기부 받는 빵은 약 200만~300만원어치다. 푸드뱅크는 식품을 무료로 기부 받아 고아원 등 사회복지 시설을 비롯해 국민기초생활수급자, 노숙자, 독거노인 등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사회복지시스템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4월말 현재 서울시민 중 결식아동은 약 2만9000명, 노숙자는 3136명에 이른다. 결식아동의 경우 겨울방학이었던 올해 1~2월에는 약 5만2000명에 달했다. 특히 매일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결식노인'은 2008년 1만4512여명에서 올해 들어 1만5380명으로 증가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박병규 실장은 "기부 받은 빵은 특히 미혼모나 여성 노숙인들이 있는 여성시설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별다른 수입이 없으면서도 남성 노숙자들처럼 무료급식소를 찾기 힘든 그들에게 빵이 유일한 끼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모두 빵이 돌아갈 만큼 물량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박 실장은 "매일 한꺼번에 빵을 나눠주기에는 물량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몇 명씩 돌아가면서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이날 오전까지도 이어졌다. 기부 받은 식품들을 차량으로 운반하는 이응교(67)씨는 양손에 든 빵 때문에 우산 쓸 겨를이 없어 그 비를 몽땅 맞았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젊은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돈이 아니라) 보람으로 하기 때문"이라며 빙긋 웃는다.
오히려 봉지에 담긴 빵이 더 많아져서 더 힘이 들었으면 좋겠단다. 하지만 갈수록 봉지는 가벼워지고 있다. 이씨는 "기부 받는 빵의 양이 많이 줄었다"며 "경기가 어려우면 생산량을 줄인다고 하더라. 사실 남는 게 많아야 서민들에게는 도움이 되는데…"라고 걱정했다. 이씨는 빵 수거가 끝나자마자 경기도 파주로 차를 몰았다. 한 식품업체에서 파스타 소스 70상자를 기부하겠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박병규 실장은 "기부를 하면 마치 못 먹는 것이거나, 안 팔려서 내주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며 "생산, 유통, 판매 과정에서 나오는 잉여 생산물을 기부하면 폐기처분하는 것보다 비용도 절감되고, 세금 감면도 해주기 때문에 일석이조"라고 강조했다. 박 실장은 특히 "끼니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기부가 많이 줄어 걱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기초수급자 매월 1만명씩 증가... 기부액은 '주춤'대부분의 푸드뱅크는 푸드마켓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푸드마켓은 기업이나 일반 시민으로부터 기탁 받은 음식이나 생필품을 일반 슈퍼마켓과 같이 진열해두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상설 무료마켓이다. 운영자가 식품을 일괄적으로 기탁 받아 수요자에게 일괄적으로 나눠주는 푸드뱅크와 달리 수요자 처지에서 원하는 식품을 필요할 때에 제공받을 수 있다.
푸드마켓은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등 저소득층 가정이 회원제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기탁물품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회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월 1회 네 가지 품목씩으로 이용을 제한하고 있다.
80㎡ 남짓한 용산 푸드마켓에는 치약·샴푸·쌀·밀가루·간장·식용유·초콜릿·과자·휴지 등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용산구에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3000명이 넘지만 푸드마켓을 이용할 수 있는 회원은 1300명 정도다. 그럼, 나머지 1700명은? 푸드마켓을 관리하고 있는 송재호씨는 "기초수급자들에게 다 줄 수 있을 만큼 기부량이 충분하지 않다"며 설명했다.
최근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기초수급자 규모는 지난해 하반기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며 12월 152만9239명까지 줄었다가 올 1월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 매월 1만 명 이상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기부의 손길은 정체돼 있거나 오히려 줄고 있다.
1998년 푸드뱅크가 도입된 이래 기부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최근 2~3년 사이에는 기부량이 감소하면서 성장세가 주춤하고 있다. 2005년 기부액이 현금으로 환산해 395억7735만원이던 것이 2008년에는 422억6287만원으로 미미한 증가를 보이는 데 그쳤다.
송재호씨는 "마켓에 오시는 회원 중에는 가져갈 물품이 없다거나 더 달라면서 짜증내는 분들도 계신다"며 "한 분이 오셔서 더 달라고 하면 줄 수는 있지만,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더 달라고 하면 못 준다.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날 오전 10시 10분경 푸드마켓을 찾은 전금순(76) 할머니는 매장 곳곳을 뒤지면서 연신 "가져갈 게 별로 없어"라는 말을 하소연하듯이 되뇌였다. 전 할머니는 우선 쌀·밀가루·샴푸를 챙겼다. 하지만 "라면이나 국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라며 네 번째 상품을 선뜻 찾지 못하고 헤맸다. 전 할머니는 소금과 조미료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하면서 한참 고민을 하더니, 결국 소금을 들고 씁쓸히 돌아섰다.
물론 물량이 부족한 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회원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그나마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으로 기부품을 받아가고 있다.
정미례(70세)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로 60만원의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방세 30만원과 전기세·난방비 등을 주고 나면 10만 원가량이 남는다고 한다. 정 할머니는 "여러 가지로 먹는 것이 수월치 않다"며 "다행히 이렇게 (회원)카드를 줘서 쌀 같은 것을 가져다 먹고 있는데, 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에게 "더 필요한 게 있는데, 없어서 못 가져가는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뭣이 잘났다고 그런 것을 생각하겠느냐. 주면 주는 대로 먹어야지"라며 정색을 하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푸드뱅크 빵이 없으면 굶어야 할 판"... "더 주면 좋지만, 주는 대로 먹어야지"오전 10시 40분경 여성 두 명이 마켓 문을 열고 들어와 이날 오전에 수거해온 빵 30여개가 담긴 봉지 하나를 들고 나갔다. 그들을 따라가 봤더니, '일·문화 카페'라고 적힌 곳으로 들어갔다. 여성 노숙인 쉼터인데, 쪽방촌이나 독거여성들도 찾아온다. 문을 연 뒤로 3년째 푸드뱅크에서 나눠주는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오소영(38) 상당원은 "우체국예금보험과 여성재단에서 운영을 위한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노숙인들에 대한 식비는 전혀 책정돼 있지 않다"며 "만일 푸드뱅크에서 빵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모두 점심을 굶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1년 전에 비해 빵의 양이 조금 줄었다는 느낌"이라며 "예전에는 여기서 먹고 남은 것을 다른 쉼터 등에 다시 나눠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여기서 먹는 것은 부족하지 않지만, 나눠 줄 게 없다"고 전했다.
오전 11시경 빨간색 재킷으로 세련되게 차려입은 50대 여성이 마켓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마 이 여성도 푸드마켓 회원? 쪽지를 보면서 쌀과 간장을 집어든 뒤, 이리저리 매장을 살피던 이 여성은 낙심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간장하고 쌀은 있는데, 고추장하고 라면이 다 떨어졌다네요. 어쩌지?…… 아무거나? 아무거나 뭘 가져갈까요?"용산구청 사회복지과 재가관리사(가정도우미) 박정옥씨다. 박씨는 독거노인을 대신해서 물품을 가져다 드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청소나 세탁은 물론 딸처럼, 며느리처럼 독거노인들의 말벗이 되어주는 게 그의 일이다. 쪽지에 적힌 물품 중 반절밖에 가져가지 못하자, 그는 내내 착잡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들에게는 푸드마켓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원하시는 것을 이렇게 적어주시는데, 물건이 없을 때는 안타깝다. 원하시는 것을 못 가져다 드리니까. 그분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들인데……. 물량이 너무 한정돼 있어서 가져다 드리는 데 애로가 많다."박씨를 따라서 이태원에 살고 있는 이순례(87) 할머니를 방문했다. 이 할머니의 집은 이른바 해방촌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젊은 사람도 숨이 찰 만큼 오르막길이 가팔랐다. 박씨로부터 물품을 받아든 이 할머니는 "(푸드마켓에서) 가져다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르겠다"며 활짝 웃었다.
"필요한 물건이 없어서 서운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기부를) 많이 해주면 좋겠지만, 많이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겠어? 할 수 없지. 주는 대로 먹어야지"라며 또 활짝 웃는다.
정기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실장은 "푸드뱅크 사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수요량 대비 공급량이라 할 수 있는 기부량이 충분해야 한다"며 "호주의 경우 푸드뱅크에서 폐기되는 량이 전체 기부량의 2~3% 내외가 될 만큼 기부량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정기혜 실장은 특히 "경기 침체 등의 원인으로 기업체도 계획 생산을 하고 있어 과거에 비해 재고품이 적은 형편에서는 정부차원의 기부업체 세제 지원 폭 확대 등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며 "명절 등 특정일을 중심으로 기부되는 한시적 기부보다는 기부를 생활화하는 기부문화 정착으로 기부량의 확대와 지속성을 유지하는 방안이 적극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