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잠자던 양심을 일깨운 촛불

 

2008년 5월 2일 시작된 촛불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여러 날이 지난 후였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온 세상에 무임승차해 사회적인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나 참여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왔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부담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상의 바쁨을 핑계로, 또 '나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라는 이기심으로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다. 촛불문화제가 열댓 번쯤 열렸을 무렵, 부채감을 던다는 생각으로 겨우 서너 번쯤 얼굴 내밀며 기사를 쓰다가 '고시 강행' 소식을 접하게 됐다. 고시를 하면 바로 판매가 시작되는데  우리는 이미 뼈있는 쇠고기를  잔뜩 수입해 놓은 상황이었다.  폐기되어야 할 쇠고기 판매를  무턱대고 허락하려는 사태를 알게 된 상식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태를 막으려 했을 것이다.

 

시민들은 그저 광우병 발병 우려가 있는 수입쇠고기 급식을 반대하는 학생들 심정에 십분 공감해 부끄러웠고  식탁의 주권을 지키려는 순수한 마음에 동조해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광우병 발병 우려가 있는 뼈있는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고 재협상을 하라고 부탁했다. 당시 협상은 진행 중이었고 이전 정부 협상 테이블이 아닌, 새 정부의 새로운 협상 테이블이 펼쳐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새 정부는 이전 정부가 협상하던 선을 훨씬 넘어 상대가 요구조차하지 않은 쓰레기까지 모두 사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그리고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며시 고시까지 하라고 하니 시민들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했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급식으로 두 끼니를 해결해야하는 수험생들에게 광우병 소고기까지 먹일 수 없어서, 내 가족 식탁이 너무 불안해서, 농민으로서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촛불을 들었다고들 했다.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체적인 판단을 근거로 주말 나들이 대신 아이 손목을 잡고 청계천 광장 앞이나 시청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바로 촛불을 켠 이들의 실체다. 그저 부끄러움의 불씨가 양심에 하나 둘씩 옮겨 붙었을 뿐인데 촛불의 배후가 누구인지 캐내라고 했다는 이야기에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저들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촛불의 배후는 사람들 가슴에  꺼지지 않고 살아있던 양심의 불씨였다는 사실을.

 

'부채감'이 '죄책감'으로

 

촛불문화제에 가면  평소에 존경을 받던 이들이나 방송에서 보던 이들, 건강한 상식을 지닌 나의 지인들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가능하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안주하려고 늘 틈을  엿보곤 했다. 그렇게 그저 단순하고 안이했던 부채감이 죄책감으로 바뀌는 대형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났다.

 

첫 사건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촛불은 대한민국 최대 국민 MT' 라는 역사에 남을만한 어록을 남긴  바로 그날이었다. 청계광장에서 시작되는 촛불문화제의 마무리는 촛불을 켜 들고 조용히 행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어깨에 태우거나 유모차를 끌고 가는 가족,  손에 손을 잡고 혹은 촛불을 감싸 쥐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걷는 사람들 앞을 막아서는 것은 언제나 닭장차와 전경으로 둘러싸인 벽이다. 길마다  골목마다 경찰과 전경차로 막아 서너 명도 지나가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발 빠른 젊은이들이  나서서 이쪽은 행진이 가능하다 저쪽은 불가능하다 길안내를 해 행렬이 어렵게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과 효자동 근처에 다다르게 되었다.

 

현대해상 앞  좁은 차길은 전경차가 가로로 가로막혀 있었다. 몇몇이 깃발을 들고 차량위로 올라가 깃발을 펼치는데 갑자기 양쪽에서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새벽이라 저절로 입술이 맞부딪칠 지경인데 갑자기 물대포 세례까지 받게 된 학생들은 추위에  덜덜 떨면서 차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타까운 시민들은  "쏘지마! 쏘지마!"를  외치며  그저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거센 물살에 몸의 균형을 잃고 차에서 떨어지던 모습, 물벼락을 맞고 추위에 덜덜 떨며  신문지를 태워  젖은 옷을 말리던 모습을 본 뒤라 그 누구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제발  물대포를 쏘지 말고 말로 하자"고 하소연하는 일에나마 목소리를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진하던 많은 이들은 그날 새벽 자의 반 타의 반 경복궁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아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추위와 졸음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과 함께 있던 한홍구 교수를 만났다. 우리는 일행이 되어 몸을 녹이려고 근처 음식점에 들렀다. 음식점에서 나왔더니 전경들이 둘러싸고 통행을 하려면 신분증을 내놓아야 한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 동네 주민이 아니면 길 위를 오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침이 밝아오기 전 강제 해산과 연행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5시에 나는 첫 전철을 타려고 함께 했던 한홍구 교수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한 교수는 "조금 후에 일행과 함께 가겠다"고 해 헤어졌다. 전철을 타고  10분 쯤 왔을 때 '한홍구 교수 일행이 연행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한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과 전경이 인도에서 뭔가 실갱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한 교수가 다가가자 다짜고짜 도로를 점거했다며 다함께 봉고차로 태워갔다는 것이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 함께 있었고 손에 피켓 하나 들고 있지 않았는데 연행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나 혼자만 빠져 나온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두 번째 사건은 한 달 뒤에 일어났다. 최저임금에서 10원 더 받고 일하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시작한 거리 투쟁이 1040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1040일째 되는 날  기륭 해고 노동자들은 하루 금식과  삼보 일배에 동참할 1040명의 자원자를 원했다. 나는 그날 하루 '삼보일배' 동참자가 되기로 했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은  이미 여러 날 단식중이어서 걸음을 걷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그 날은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나도  비를 맞으며 삼보 일배를 했는데 몸이 으슬으슬 떨려 퍼포먼스와 문화제에 겨우 참석했다가 10시쯤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가 접한 소식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폭력진압을 막으려고 맨몸으로 길에 스크럼을 짜서 누운 YMCA간사와 회원들을 방패와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찍고 때리며 지나가 수많은 이들이  다쳐 피를 흘렸다. <시사인> 기자는 카메라와 프레스 증명이 있는데도 강제로 연행돼 50여 분 뒤 풀려났고, 장비를 정리하던 <오마이뉴스> 기자가  방패에 찍혀 병원에 입원을 했다.  현장 사진을 찍어 온 아는 활동가 한명은 왼팔을 방패에 찍혀  칼자국 같은 상처와 시퍼런 멍이 들었다.

 

6월 29일 새벽에 일어난 그 사건은 그동안 굳게 침묵하던 종교계를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강경 진압에 촛불들이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촛불들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금식기도에 들어갔고 뒤이어 불교계와 개신교가 합세했다. 안팎으로 촛불이 잦아들 때마다 촛불을 다시 키운 사람은 눈과 귀가 막힌 측이었지 촛불을 밝혀 든 이들이 아니다.

 

'곗돈은 탔지만 빚은 남았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촛불을 켜고 맨 앞자리에 앉아 촛불의 바람막이가 되어 함께 하던 날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중계를 하던 기자들, 그리고 함께 한  수많은 이들도 함께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 우리가 틀린 것이 아니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구나! 아직은 세상에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있고 정의는 살아있구나!'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날 그 감동 넘치는 자리에 그냥 서 있던 것만으로도 촛불을 켜 들었던 이들은 다시 일어 설 힘을 받았을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어른들의 부끄러운 양심을 일깨운 촛불 소녀들의 '촛불'을 "그동안 붓기만 하고 잊고 지내던 민주화의 곗돈을 탄 것"으로 비유를 했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흘린 땀의 대가가 소녀들의 촛불로 구체화 되었다는 이야기다. 분명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곗돈'을 타긴 탔다. 그러나  단 한번 받은 민주화의 뭉칫돈만으로  과거의 빚이 모두 청산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은 아니다. 비록 곗돈을 타긴 했지만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빚마저 갚았을 때 진정한 민주의 열매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깊어지면 다시 거리에 서리라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비아냥조로 이렇게 말한다. "왜 꼭 거리로 나가 촛불을 켜고  거리를 행진해야 하느냐? 조용히 이성적으로 뜻을 전달할 수는 없느냐"고.  당신이 만일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부디 한번만이라도 촛불을 켠 이들과 함께 해보길 바란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촛불만큼 평화롭고 조화롭게 다양한 목소리를 낼 도구나, 촛불만큼 타인의 목소리를 잘 경청할 다른 도구는 없다는 사실을.

 

작년에 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새로 편입해 공부하던 방송대 청소년교육과에 휴학계를 냈다. 이론만으로 무장하는 청소년교육학이 몸으로 민주주의를 살아내는 진짜 청소년들을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을까 회의도 일었고, 촛불문화제를 열심히 쫒아 다니느라 공부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시험을 앞두고도 11시까지 대한문 앞을 떠나지 못해, 한학기 성적이 엉망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요즘 이따금씩 지난해의 촛불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일상이 피곤하고 세태에 절망 할 때 마다  광화문 광장 앞 그날을, 물대포를 맞고 방패와 곤봉에 찢겼던 지인들을 떠올린다. 경찰서에서 단아한 얼굴로 단식을 하던 이의 맑은 얼굴도 떠올려 본다. 촛불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변화의 더딤에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촛불은 사람들 가슴 속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으며 그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가슴에 켜둔 그 촛불을 억지로 끌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처럼 겁 많고 이기적이며 한없이 소심한 아줌마조차도 부끄러움이 더 깊어지면 또 다시 거리에 서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촛불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 응모글입니다.


태그:#촛불 1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