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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이 대거 참전했으며,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한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이에 따라 남한 사회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서울신문>에서는 하루 빨리 원자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김성식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소리를 한댔자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을 터이니까, 내키는 대로 아무런 말이나 막 하려니 여기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이 만들어 놓은 원자탄을 우리 땅에 제발 써 주십사 하는 심보를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가공할 살인무기라는 원자탄을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심성을 타고났을까?

다음 날 강의하러 간 김성식은 허탕을 쳤다. 학교는 갑자기 방학을 선포하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어린이와 늙은이는 시골의 연줄을 찾아 서울을 떠나도 무방하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다. 그는 압록강까지 올라가 압록강 철교까지 폭파하도록 만들었던 국군과 유엔군이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평양을 미련 없이 내 주고, 다시 38선을 위협받은 지경으로 돌변한 전황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군이 그리도 강하단 말인가?'

중국군의 한반도 직접 투입이 확인된 것은 10월 26일의 시점이었다. 파죽지세로 압록강 가까이 쳐 올라간 국군 6사단은 벽동을 목표로 진격하던 중 동림산 기슭에서 정체불명의 적 부대와 만나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선두 부대가 적의 공격성 저항으로 분산되자 곧 지원 부대가 투입되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38선 돌파 이후 없던 일이었다. 국군은 적의 저항이 갑자기 강력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 오후 국군은 낯선 복장의 병사 하나를 생포한다. 이 이상한 복장의 병사는, "나는 중국군이며 이미 10월 19일부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그 시간 평양에서 적의 수도를 점령한 유엔군 지휘관들은 마치 전쟁이 끝난 것처럼 기쁨에 들떠 있었다. 미 육군성과 미군 사령부는 미 제2사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차후 한국에 반입될 예정이었던 탄약을 일본 보급창으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지휘부가 전쟁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데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리는 없었다. 오히려 고향을 떠나 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의 마음은 더욱 들떠 있었다. 그들은 추수감사절 칠면조를 동경에 가서 먹고, 긴자의 환락가를 쏘다니는 상상에 부풀어 있었다.

한편 미국은 한국의 동의도 없이 북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발하여 북한 지역 통치권을 대한민국 정부가 행사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남한의 우익인사들을 북한의 시·도지사로 임명하려 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통치권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행사하되, 각 시·도지사는 현지의 북한 인사 중에서 기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주장은 미국에 밀려, 유엔이 군정요원을 임명할 때 한국정부와 협의한다는 선에서 결정되었다.

중국군의 전면 개입이 확인된 것은 이 시점이었다. 신기루처럼 나타나 국군과 미군을 단 열흘 만에 청천강까지 밀어낸 정체불명의 부대들은 11월 6일이 되자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군은 처음 대체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리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미8군 사령관 워커의 순직

교묘한 유인 전술과 후방 매복, 그리고 야간 전투에 능숙한 중국군에 밀려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평양 철수 명령이 공식적으로 하달된 것은 12월 3일의 일이었다. 워커 미 8군사령관은 현 단계에서 8군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중국군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것이라는 보고를 맥아더에게 올렸다.

그로부터 미군은 하루 평균 10km씩 후퇴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도망이었다. 썰매, 우마차 등으로 기동해야 하는 중국군으로서는 차량으로 후퇴하는 미군을 따라 붙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평양 철수 20일 만에 미군은 38선까지 밀려났다. 중국군은 임진강 - 춘천 북방 - 양양을 잇는 38선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 6개월 만에 전선은 도루묵이 되고 만 것이었다.

한국의 신문들은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썼기 때문에 후퇴가 불가피했다고 보도했다. 중국군이 시체로 진지를 쌓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군 지휘부는 한국의 신문에서 말하는 인해전술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요컨대 인해전술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도 많고 원망도 무성했던 흥남 철수가 이루어진 날은 공교롭게도 맥아더가 전쟁의 종결을 호언장담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설상가상으로 미 8군사령관 워커가 순직했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이국의 전장에서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지프가 국군의 트럭과 충돌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미군 휴양소가 있던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야산에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한편 인민군에서는 영웅적인 빨치산들이 활약하여 그를 죽였다고 발표했다.

후퇴나 방어 작전만으로 일관했던 워커 대신에 부임한 리지웨이는 양쪽 가슴에 두 발의 수류탄을 매달고 최전선을 시찰하는 호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한국과 한국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세력의 폭력에 맞서 서방 자유주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한 많은 흥남철수와 1·4후퇴

한편 38선 일대에서 미군과 대치하게 된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이제까지 써 오던 지원사령부라는 명칭을 버리고 중국군에다 인민군을 통합시켜 지휘할 연합사령부 구성에 착수했다. 이는 인민군 작전지휘권을 중국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김일성으로서는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합의한 일을 그가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조중연합사령부를 결성한 펑더화이는 중국 대륙 8천 리를 가로지르며 대장정을 치른 바 있는 마오쩌둥에게 전략을 훈수 받으며 서울 공격에 착수했다. 마침내 12월 31일 모든 전선에 일제히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유난히 추운 날 어둠이 일찍 찾아든 저녁에 중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한강에도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했다. 강물이 결빙되어 장애물로서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서울을 비운 것은 누구나 아는 대로 그 유명한 1월 4일의 일이었다.                  

다시 도망갈 봇짐을 꾸리면서도 각 기관과 직장마다 여전히 심사와 적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반드시 집어내야 할 악질분자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수사기관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러 저래 잔류한 사람들의 수난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얼어붙은 도로에 보따리를 싣고 달리는 트럭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딱히 피난 갈 곳도 없고 돈도 없는 시민들은 납덩이같은 불안을 억누르며 애꿎은 피난 자동차의 뒷모습만 흘겨보고 있었다.

김성식은 서생(書生)으로서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이제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아들딸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들에 비해 자기는 무능하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별 대책도 없었지만 일단 짐을 꾸려 놓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가서 일가족이 몸 붙일 곳이라도 생길지, 간다고 하더라도 서울을 밀어버린 중공군이 대구· 부산은 그냥 둘지... 아무것도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질 이 거리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서재에 버려두고 갈 정든 책들을 둘러보았다. 점심을 굶기도 하면서 아낀 돈으로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들이었다. 긴 겨울 밤, 한 장 한 장 넘기며 씨름했던 그 말없는 친구들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6월 25일 경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김일성#워커#리지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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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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