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철쭉 제례
황매산 정상에서 몇 굽이를 넘은 다음 나무 계단을 타고 한 30분쯤 내려오니 황매평전이다. 황매평전은 황매봉에서 베틀봉으로 이어지는 남북능선 좌우에 펼쳐져 있는 일종의 작은 고원이다. 황매평전은 서쪽사면에 비해 동쪽 사면이 훨씬 넓고 평평하다. 마침 황매산 철쭉제례가 이곳 황매평전 능선에서 열려 주최 측에서 준비가 한창이다.
제단 뒤로 오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고 제단에는 제물이 차려지고 있다. 11시부터 제례가 시작되는데 아직 30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다. 제단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벌써 축제 분위기다. 더욱이 사물놀이패가 제단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두 명의 꽹과리 꾼이 앞에서 리드를 하고 그 사이에 두 명의 고수와 한명의 징잡이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뒤에는 장구꾼이 가는 채를 두드리며 소리를 내고 마지막 줄에는 다시 고수들이 서서 북을 두드린다. 이들의 소리가 화음을 이뤄 온 산에 불려 퍼진다. 사실 사물놀이는 화음이라기보다 박자의 어울림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들의 복장 또한 특이한데 앞줄의 사람들은 흰 바지에 검은색 조끼를 입었고 팔에는 빨강 파랑 노랑의 색동을 달았다. 뒤에 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흰 바지와 흰 적삼에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긴 조끼를 걸쳤는데 조끼가 연초록색이다. 이들 머리에는 띠를 둘렀는데 앞에서 꽹과리를 치는 상쇠와 부쇠의 띠는 빨간색이다.
제례가 11시에 시작된다고 하니 우리는 그걸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15분 정도 공연을 보다가 베틀봉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서쪽으로 성벽과 누각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을 보기 위해 길을 오른쪽으로 향하니 황매산 제단이 나온다. 황매봉 정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을 향해 매년 한 번씩 제사를 지냈을 것 같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흔적
제단을 지나 성벽에 오르니 저 아래로 영화 주제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성벽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성벽 한 가운데는 누각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뭔가 좀 어색하다. 산성의 기본을 모르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산성은 골짜기를 둘러싸든지 아니면 산줄기를 따라 쌓아 만들어야 하는데 흉내만 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영화촬영 세트장인 영화 주제공원은 행정구역상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신촌에 있다. 이곳 영화 주제공원에서 <태극기 휘날리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1950년 두 형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태극기 휘날리며>는 2003년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6․25사변이 일어난 1950년이다. 두 형제의 우애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사상의 차이로 인해 겪는 갈등을 그린 전쟁 영화이다. 이 영화가 바로 이곳 황매평전에서 촬영된 것이다.
산성의 누각에서 법평리 신촌 쪽을 내려다보니 영화 주제공원의 막사들이 보인다. 오늘의 산행 코스가 그쪽으로 잡혀있지 않아 가까이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이곳에서 다시 베틀봉 쪽으로 가다보니 중간에 두 개의 인공 구조물을 만날 수 있다. 이것 영화촬영을 위해 만들었다가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세트이다.
하나는 임시 막사이고 다른 하나는 봉화대인 것 같다. 막사는 동물의 우리처럼 아주 단순한 모양이다. 봉화대는 나무판으로 만든 원통형 구조물로 아래 부분에는 아궁이를 윗부분에는 굴뚝을 만들었다. 나무판 위에는 황토를 발랐는데 최근에 바른 것처럼 황토색이 선명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개 장면 사진들을 보니 황매평전에서 찍은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총과 깃발을 들고 능선에 서 있는 형제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이 그렇고, 국군과 인민군의 전투장면 역시 그렇다. 영화 장면들을 보니 황매산은 온통 초원지대로 철쭉은 찾을 수가 없다. 철쭉꽃이 피는 현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황매평전에 장이 선 것 같다.
황매평전은 임도를 통해 산청군 차황면과 합천군 가회면에서 차를 타고 올라올 수 있다. 이번 철쭉제는 합천군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가회면 쪽에 차량과 사람이 더 많다. 황매평전의 목장 지대 일부에는 하얀 천막을 친 행사장이 마련되어 있고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하게 올라와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차와 구급차도 대기하고 있다. 베틀봉 동쪽 철쭉 제단 앞으로 가니 주변 구릉에 철쭉꽃이 만개해 있다. 꽃밭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들어가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또 구릉에 마련된 좌판에는 스카프 등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스카프를 사는 사람에게는 덤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준다고 한다. 그런데 웬 쌀. 산행을 하면서 배낭의 무게를 줄여가는 게 상식인데 무게를 더해야 하다니. 사은품 치고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옆에는 보물찾기 접수처도 있고, 촬영사진 접수처도 있다. 다들 축제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축제가 잘 치러질 수 있는 것 같다.
산속의 축제가 가지는 야누스적인 측면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철쭉 제단 옆에 마련된 낙서판이다. 하얀 천을 마련해 놓고는 그 안에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글을 썼다. 낙서판에 사람 얼굴 그림이 두 개 보이고 또 빨간 철쭉을 표현한 그림이 하나 보인다.
그리고 글은 주로 '사랑 한다' 와 '왔다간다' 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조금 다른 것으로는 회사의 발전과 가족의 건강을 비는 내용이 있다. 사실 이곳 황매산과 황매산 철쭉제에서 느낀 감상을 적어놓은 시나 논평이 있기를 은근히 바랬는데 그러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
우리 팀은 철쭉을 보기 위해 이곳 황매산을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공연도 보고 생각지도 않았던 영화촬영 현장도 보고 또 철쭉제 주최 측에서 마련한 행사에도 참여를 하는 가외의 소득을 올렸다. 이런 것이 다 산행의 또 다른 재미이다. 사실 주최 측에서 마련한 이런 행사들 때문에 눈과 귀가 좀 더 즐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에서 이루어지는 축제가 산을 찾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불러 들여 자연을 훼손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