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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9일) 아침 거실에서는 부모님께서 농협에서 위탁받아 재배한 고추모를 조합원들에게 나눠준 개수를 맞추느라 소란스러웠습니다. 조합원도 아니고 농협에 고추모 신청도 하지 않은 이들이, 말도 안되는 부탁을 딱 부러지게 거절 못하는 아버지께 애원해 고추모를 타가는 바람에 이만 저만 피곤한게 아니었습니다.

고추모 부리는 것도 고달픈데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고, 고추모 제값도 치르지 않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두루뭉술한 아버지께 그냥 가져간 사람들에게 "고추값 50원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하십니다.

암튼 즐겨찾는 도서관이 휴관일이라 집에서 하루 푹 쉴까 아니면 다른 도서관에 나가볼까 고민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방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오늘 오후에 시간되냐?? 시간되면 모판 좀 나르자!!"

 고추모 농사를 끝낸 뒤 모판에 볍씨를 뿌려놓았다.
고추모 농사를 끝낸 뒤 모판에 볍씨를 뿌려놓았다. ⓒ 이장연

지난 겨울과 봄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힘겹게 기른 고추모를 동네 주민들에게 모두 내어준 뒤, 예전처럼 손수 김매기를 할 수 없어 검은 비닐로 덮은 윗밭에 고추를 사 심고 고구마도 심은 뒤 이제 봄철 농사의 하이라이트인 모내기를 위해 손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돈벌이도 시원찮은 백수 블로거라서, 어머니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추모 개수와 그 값을 매겨 농협에 간 아버지가 영농회장 회의를 끝내고 점심께 돌아오시면 그 때 아랫밭에 나가 모판을 나르면 된다기에, 그동안 노트북을 켜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해 블로그에 올리고 짬내어 밥벌이도 했습니다. 시간은 재빨리 지나갔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집근처에 사는 동생을 찾으시더니 먼저 밭으로 나가셨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물과 빵을 챙겨 아버지를 뒤따라 집을 나섰고, "논에 나오거든 문 잠그고 나와라!"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일당 1만원도 안되는 백수 블로거의 일을 마친 뒤, 옷을 훌떡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겨 오후2시30분께 아래밭으로 향했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농경지를 인천시는 인천아시안게임 선수촌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얼마남지 않은 농경지를 인천시는 인천아시안게임 선수촌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 이장연

세상살이도 농사꾼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부모님이 집을 나선지 30분 뒤에나 나와 서둘러 밭으로 향하는데, 여름으로 접어든 들녘은 이미 모내기를 끝낸 곳도 있었고 모내기를 위해 갈아놓은 논에 논물을 가둬놓기도 했습니다. 농로 주변의 밭에는 파릇파릇한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냉이와 쑥으로 가득했던 농수로는 힘찬 물줄기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볍씨를 플라스틱 모판에 심어둔 아랫밭 비닐하우스에 이르니, 지게에 모판을 지고 논둑을 오가는 아버지와 외바퀴 수레로 모판을 나르는 동생과 어머니가 보였습니다. 늦게 나온 것이 죄송스러워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모판을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농수로를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간다.
농수로를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간다. ⓒ 이장연

 일찍 모내기를 끝낸 논
일찍 모내기를 끝낸 논 ⓒ 이장연

모판을 겹쳐 들고 비좁은 논둑길을 오가야 했는데, 아버지는 "욕심 부리면 안된다"면서 "모가 부러지니까 조금씩만 날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모판을 두 개씩 겹쳐들고 줄줄이 밭과 논을 오갔습니다.

맨 발바닥에 천연 지압기가 따로 없는 작은 돌멩이와 진흙의 감촉도 오랜만에 느끼면서, '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밭일 논일을 거들었는데' 하는 추억과 자식 노릇 제대로 못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모내기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렇게 온가족이 총출동해서 작년보다 일찍 모판 나르는 일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모판이 잘 떨어지지 않아 떼어내는데도 꽤 힘을 써야해 날이 저물도록 모판을 날랐는데, "올해는 아버지께서 모판 아래 종이를 깔아 잘 떨어지게 했다"고 어머니는 자랑하시더군요.

암튼 농사꾼에게 참 모진 세상에서도 욕심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땅을 일구고 곡식을 기르는 순박하고 지혜로운 부모님의 농사일에 손을 보탤 수 있어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들어가라"고 하셔서, 집에 돌아와서는 그간 맘에 담아두었던 대청소를 옥상부터 지하까지 해버렸습니다.

그간 농사일을 제대로 거들지 못한 죄스러움을 검은 먼지때와 함께 벗겨냈습니다.
그렇게 농사꾼과 농사꾼 아들의 하루가 저물어 갔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모판을 떼어내고 있다. 낫질을 하지 않아도 모판이 잘 떼어졌다.
어머니와 동생이 모판을 떼어내고 있다. 낫질을 하지 않아도 모판이 잘 떼어졌다. ⓒ 이장연

 떼어낸 모판을 외바퀴 수레에 실었다.
떼어낸 모판을 외바퀴 수레에 실었다. ⓒ 이장연

 지게로 나른 모판을 논에 부리고 있다.
지게로 나른 모판을 논에 부리고 있다. ⓒ 이장연

 농삿일은 이렇게 돕지 않으면 안된다.
농삿일은 이렇게 돕지 않으면 안된다. ⓒ 이장연

 오늘은 이앙기로 모를 낸다고 한다.
오늘은 이앙기로 모를 낸다고 한다. ⓒ 이장연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모내기#모판#농사#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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