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과연 결론이 내려질까?"
"설마 또 미루기야 하겠어?"
지난 20일 '행여 재판이 또 미뤄지지는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2호선 교대역을 나서 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봉구의원 의정비 부당이득반환 소송의 최종 선고를 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재판이 영화에서처럼 검사와 변호사가 각자의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날카로운 변론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이번 주민소송을 진행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본 재판
재판 시작 10분 전인 오전 9시 50분, 행정법원 앞에는 도봉구 의원 몇 명을 비롯해 여럿이 무언가 상의하고 있었다. 도봉구 배지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청직원 또는 의회사무처 직원이리라. 법정에는 다른 구의원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봉구의회 14명 의원 중 한 두 명 빼고는 다 참여한 듯하다.
이번 소송은 주민들이 구청장을 상대로 낸 것이라 의원들은 오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물론 의정비가 구의원들과 직접 연관된 일이라 참관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주민들이 마련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하는 일은 전날 불참을 통보하는(한나라당 모 의원) 등 그다지 성실하다고 볼 수 없는 활동을 해온 것에 비춰보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의원들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함께 소송을 제기한 도봉 지역 활동가들과 자리를 잡고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늦은 오전 10시 10분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건번호 2008구합21867"
드디어 우리 사건 차례다.
"피고는 별지 목록 기재 의원들에게 2136만원씩 지급할 것을 청구하라.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야호"라고 소리치고 만세를 부르고 싶었지만, 법정에서 그랬다가는 쫓겨날 터라 주먹만 불끈 쥐면서 기쁨을 감췄다.
결과를 듣고 법원 바깥으로 나와 상황을 점검하고 있는데, 구의원들과 구청직원들이 뒤따라 나왔다. 평소 같으면 인사 정도는 하려고 다가오던 의원들이 오늘은 그냥 자신들끼리 모여 의견을 주고 받더니 급히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뭔가 일을 했구나'
"편법인상된 지방의원 의정비를 환수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서태환 부장판사)는 20일 서울 도봉·금천·양천구민 14명이 구의원들에게 과다 지급된 의정비를 돌려받기 위해 해당 구청장들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반환 주민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2006년 지방자치단체의 위법한 예산 집행 등을 견제하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주민소송제도가 도입된 이후 주민들이 승소한 첫 판결이다. 지난해 서울시 감사 결과 25개 자치구 중 16곳이 구의원 의정비 인상과 관련해 규정을 어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판결로 3개 자치구 의원 42명이 돌려줘야 할 금액은 모두 8억7000만원이다. 구청별로는 도봉구의원 14명이 1인당 2136만원, 금천구의원 10명이 1인당 2256만원, 양천구의원 18명은 1인당 1915만원씩을 반납해야 한다." <경향신문> 보도
도봉구로 돌아와서 언론에 나온 기사들을 보고서야 '우리가 뭔가 일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봉구 뿐만아니라 양천구, 금천구 주민들이 제기한 주민소송도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주민소송제도가 도입된 후 첫 번째 승소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2년여에 걸친 구의원 의정비 관련한 활동과 1년간의 소송기간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2007년 11월 도봉구 의원들이 의정비 관련 조례안을 발의했을 때,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도봉지역 시민단체는 서명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의정비를 올리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견서에 주민들은 서명으로 함께 해주었다. 여러 가지 사안으로 거리 서명을 받아봤지만, 다른 사안에 비해 주민들의 반응은 좋았다. 사흘간 퇴근시간에 870여명의 서명을 받아 의견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도봉구의회는 주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묵살했다. "서명한 800명이 뭐가 많냐"는 한 의원의 발언은 굳이 들출 필요가 없다. 그렇게 도봉구의회는 5700만원으로 2008년도 의정비를 결정했다.
다시 거리로 나가 주민들의 서명을 모았고, 12월 28일 서울시에 주민감사를 청구했다. 4개월 뒤 나온 감사 결과는 '의정비심의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문제'가 있었고, '여론조사 내용과 방법에 일부 문제점이 있어 신뢰할 수 없는 결과'이므로, '심의위를 다시 구성해서 재심의 하라'고 나왔다. 감사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제대로 바로 잡겠거니 생각했다.
구청장과의 면담, 의원들과의 면담을 하면서 의정비를 다시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봉구 의회와 도봉구청은 감사결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못을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의정비는 연 5700만원을 기준으로 5개월째 지급되고 있었다. 주민들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살펴보라고 뽑은 주민들의 대표가 주민의 세금만 축내는 꼴이었다.
의원들과의 면담에서 인상분에 대해 다른 지역구의 의원처럼 자진 반납하라고 요구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애석하게도 "법대로 하라"였다.
의회와 구청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주민감사청구를 한 후에 주민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의원들의 말대로 '법대로' 하게 된 것이다. 의정비 사안에 관여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소송을 제기하기로 하고,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에서 소송 대리를 맡아주기로 했다.
주민소송을 제기한 2008년 5월 28일부터 1년 동안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도봉구 활동가들은 서초구 행정법원까지 참관을 하러 아침을 서둘렀다. 특별히 진행되는 게 없어 보이는 재판 과정과 아무런 통지 없이 연기되는 재판, 법정의 엄숙한 분위기가 익숙해질 즈음 행정 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액수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기초의원 의정비는 사실 액수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일하기 위해 적정한 액수의 의정비를 받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정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주민들의 목소리와 감사 결과를 무시하는 의원들의 태도는 주민의 대표가 가질 모습은 아니다.
'도봉구 주민 모두가 잔치 벌일 일이군요.'
'주민들의 수고가 승리를 거두었네요. 축하축하'
'워메~ 고생하셨어요~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정말 큰 일 하셨습니다. 축하해요'
도봉구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주민소송 승소 소식을 알렸더니 돌아온 답문자들이다. 축하는 나를 비롯해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이 받을 일이 아니라 주민 모두가 함께 축하할 일이다. 이번 소송의 승리를 통해서 주민이 뽑은 대표의 잘못을 주민들이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주민들과 함께하는 작은 참여가 큰 일을 이루는 것. 짜릿한 경험이다.
SBS의 보도를 보니 의회에서는 항소를 하겠다고 했나 보다. 앞으로 구청과 구의회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조치를 취할지 주민들과 함께 지켜볼 일이 남은 것 같다. 부디 법원에 다시 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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