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아침, 컴퓨터에서 메일을 체크하던 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대요."
속보로 뜬 웹의 뉴스를 보고 놀라서 한 소리였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그분이 검찰에 불려가고 그분의 가족과 인연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소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때부터 내심 우려되는 점이었습니다.
그분은 늘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건 승부를 해오셨습니다. 동서지역의 벽이 너무나 굳건해서 누구도 그것을 허물 수 없다고 여겼을 때 오히려 자신의 진영이 아닌 곳, 아니 적진이라고 여길 곳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도 그 자리를 걸고 다시 국민들의 신임을 물었습니다. 옳지 않다면, 원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높은 자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리 어렵게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내놓을 분임이 분명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니, 진실과 오해, 정치적 이해가 끝없이 얽힌 이 퇴임 후의 시국에 쾌도난마(快刀亂麻)의 해법을 구사하실 것이란 추측이었지요. 어쩌면 그것이 이런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던 때에 저의 처가 제게 전한 속보는 저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티슈가 책상에 수북이 쌓이도록 눈물을 쏟은 처는 저의 아들 영대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1997년도의 한 장면을 기억해내고 더욱 서러운 마음이 되었던가 봅니다.
노무현이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대선캠프에서 김대중 후보를 그림자처럼 동행하던 때였습니다. 연기를 하고 있던 나리 누나를 동행했던 5살의 영대는 우연히 김대중 대선광고의 모델로 발탁되었습니다. 김대중 후보의 선거광고를 촬영하던 현장에서 저의 처와 한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노무현은 유난히 얌전한 영대를 보고 번쩍 안아 올리며 '잘 생기고 착하기까지 하구나!'라며 칭찬했습니다.
이처럼 서민을 안아 올리고 격려하고 섬기는 그 분의 태도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는 듯했습니다. 국민들에게 권위 대신 위로로 다가가고자 했고, 최고의 권좌에서도 서민의 마음과 몸짓을 잃지 않았던 그는 몸을 너무 낮추는 바람에 그것이 대통령의 체통을 손상하는 일이라며 비난받기까지 했습니다. 참 바보였지요.
정성운 사부님 댁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잠시 차를 멈추었습니다. 정성운 사부님이 난감해했습니다.
"노무현은 학창시절부터 저의 정신적인 사부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처가 저보다 더 슬퍼서 온종일 울고만 있습니다."
최효수 사모님은 마주보기 딱할 만큼 퉁퉁 부은 얼굴이었습니다.
미국의 친구 'Julia Longman'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I heard about former President Roh, and wonder how things are over there. It was a very shocking tragedy."
저는 줄리아에게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요?
오랜 저의 상관이었던 김두하 전무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일본 검찰은 권좌에 있을 때 엄격한 법을 적용하고 하야하면 재임 중의 일에 대해 불문에 붙인다는데 우리는 그 반대입니다. 정치행위는 법을 초월해서 이루어지곤 했지 않습니까? 이후락은 대북접촉이 위법인 시절에 북한을 방문했으니 서슬이 시퍼렇던 반공법위반이 아닙니까? 이것은 정치행위임으로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은 것이지요. 노대통령의 재임중의 합법한 행위에까지 검찰의 사정을 받아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기를 강요한 것이 아닌가요?"
타우와 함께 인사동의 한 전시장으로 나들이 할 일이 있었습니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내려 청계천을 거쳐 인사동으로 향했습니다. 청계천 초입의 광장을 수십대의 경찰버스가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경찰도 곳곳에서 길목을 막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빈 광장을 경비하고 있군요. 왜 우리나라의 경찰력이 이 시간 고유하고 시급한 업무대신 이 빈 광장을 지켜야 하나요?"
타우의 말처럼 '광장이 무서운 위정자'를 가진 우리의 입장이 슬펐습니다.
우리는 늘 한발 늦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가슴을 칩니다. 살아생전에는 이처럼 소중하고 절실한 분임을 몰랐던 우리는 그 분을 잃고서 온 나라에 눈물로 강을 이룹니다.
저는 저의 처로부터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이유 모를 무기력에 시달렸습니다. 아무 글도 쓸 수 없었고, 깊은 생각을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곳에 포스팅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경제를 부흥시키고 나라의 안보를 든든히 하는 일뿐만 아니라 때로는 러시아의 노조지도자 출신의 어떤 대통령처럼 즉흥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줄도 아는 문화대통령, 미국의 배우출신 대통령처럼 TV연설의 리허설을 하는 중에 유머로 실수도 할 줄 아는, 꾸며진 웃음이 아닌 웃음을 웃을 줄 아는 대통령을 그리고 힘겨울 때 기대어 투정을 부리고 싶은 저의 이웃 같은 대통령을 갖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저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 분이 누구도 결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온 국민이 그분과의 이별의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영웅으로 편입되기보다 끝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의 투정을 받아주는 수고를 계속해주시길 바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현실이 답답할 때, 몹시 분하고 억울할 때 누구에게 투정을 해야 할까요. 국민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미운 사람, 노무현. 부디 천국에서 예의 그 환한 웃음만 지을 날들이기를 단장(斷腸)의 마음으로 기원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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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