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 5월 28일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성년이 된 전교조를 다각도로 돌아본다. [편집자말] |
"김OO 선생님이 학교 그만두셨대."
"박OO 선생님은 전근 가셨다는데.""야, 최OO 선생님은 학교에서 잘리셨단다."대학입시를 앞두고 더위에 지친 몸을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며 점수와 씨름하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몇몇 선생님들의 거취 문제로 학교는 어수선했다. 바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가입 교사 1527명 전원이 파면·해임되었던 1989년 7월의 일이다.
전교조에 대한 첫 기억은 힘겹던 고3 시절과 맞물려 있다. 전국교사협의회가 설립된 1987년부터 전교조가 공식 출범한 1989년까지는 정확하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 학생들을 참교육 1세대라 부른다.
그 전교조가 지난 5월 28일 창립 20주년과 합법화 10주년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더욱이 다시는 기억하기 싫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스무 살 청년'이 된 전교조에 대한 바람을 전한다. '참된 교육'을 희망하면서.
당시에 나는 전교조를 제대로 몰랐다. 아니, 입시 공부에 지친 육체를 돌보랴, 점수를 1점이라도 더 올리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흘린 눈물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절규는 오로지 우리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화교육과 참교육을 실천했던 전교조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오랜 기간 남모르게 점심 값을 쥐어주시던 선생님, 집안의 불상사로 이도저도 못 가던 제자를 위해 티나지 않게 친구의 부모님에게 편의를 봐 주도록 조치해주시던 선생님, 국어 문제 하나 더 푸는 것보다 나이에 맞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며 교과서에는 없는 시 한 편을 칠판 가득 적어주시던 선생님, 고3병을 앓으며 학교 밖에서 방황하는 제자를 찾기 위해 몇 날 며칠 밤거리를 뒤지며 걱정하시던 선생님….
훗날 전교조의 존재를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교조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던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뜨거운 청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그랬다.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계신 선생님은 우리의 안녕을 먼저 돌봐주신 진정한 스승이셨다.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내걸고 '참교육'을 온몸으로 실천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시던 스승이셨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던 우리들은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끝내 그 선생님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선생님도 한 인간일진대 사랑하는 제자들이 있는 학교에 발걸음을 놓을 수 없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으셨을까. 그날 이후 '참교육'을 떠올릴 때면 늘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전교조는 1989년 대량 해직 사태를 맞은 이후에도 학교 일선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교육 현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촌지 안 받기 운동'을 펼치며 학부모들의 지지를 받았고, 교육감과 교장 등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깨끗하고 열린 교육'을 지향하며 학교의 주인은 학생과 교직원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두발 규제와 체벌의 문제를 학교 공간에서 사회로 끌고 나와 공론화를 시키는 등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바꾸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오랫동안 합법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며 늘 탄압을 받았어도 국민들과 학부모들이 지지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전교조는 학생들이 맘껏 뛰놀 수 있고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익집단, 반대만 일삼는 정치단체' 꼬리표를 떼라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중반 전교조를 지지하며 함께했던 개인의 기억은 그래서 소중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금의 전교조는, 내가 눈물 흘리며 선생님을 애타게 부르던 때의 전교조가 아니다. 전교조가 처음에 내걸었던 참교육의 가치는 너무도 많이 퇴색해 있다. 나이로 치면 약관 20세 청년으로 훌쩍 자랐음에도, 활동하는 것은 오히려 20년 전만 못하다.
1999년 합법화를 이룬 전교조는 실제로 이후 10년 만에 많은 불명예 꼬리표를 달았다. 선생님들이 모인 집단으로서는 치명타와 다름없는 '이익집단'이라는 꼬리표는 애교에 불과하다. 어느덧 '반대만 일삼는 정치적 단체'라는 꼬리표를 달더니, 이제는 학생들의 인성과 품성을 키우는 선생님들이 '성폭행과 성추행 사건'의 꼬리표까지 달았다. 오죽했으면 전교조 조합원의 입에서 "전교조인 게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고백이 나왔을까.
지난 5월 18일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은 창립 20주년 기자회견문을 통해 "그간 역대 정부가 입시제도와 사교육 대책을 수없이 내놓았지만 모두 실패했다"며 "내년 지방자치 선거를 이명박 교육정책 심판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 위원장은 그 외에도 '열린 교육'을 지향하고 '참여와 소통'이 어우러진 학교를 만들겠다며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말을 이었다. 통합교육과 공동체교육을 중시하며 교사와 학생이 주도적으로 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교육지원 체제로 변화를 꾀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정 위원장이 내린 전교조에 대한 진단과 현실 인식은 매우 우려스럽다.
역대 정부가 내놓은 교육 대책이 모두 실패할 동안, 그렇다면 전교조는 무엇을 했는가. 합법화 이후에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교육행정정보시스템(네이스)·교원평가' 반대투쟁에 힘을 모으며 국민들의 눈에 기득권 지키기 집단으로 비쳤다. 지난 10년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로, 전교조를 '반국가 교육 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지금 정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호적일 때였다.
2003년 6월 9만4400명의 최고 조합원 수를 기록했던 전교조는 2008년 12월 7만7700명으로 줄어들었다. 조합원 수로 전교조의 성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조합원 수가 줄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중 '도덕성 추락'과 '국민과 거리감'은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 위원장의 현실 인식이 우려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정권의 교육 정책을 심판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이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 위원장이 밝혔듯이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학교를 혁신할 수 있는 정책"을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닌, 긍정적인 대안과 정책을 통해 도덕성을 회복하고 국민과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 먼저 생각하는 초심 찾길
5월 23일부터 대한민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눈물바다로 변했다. 노 전 대통령의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유언은 국민의 마음을 울렸다.
전교조는 싫든 좋든 죽으면서까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 노 전 대통령의 일관된 원칙을 되새겨봐야 한다. 아직 역사의 평가가 남아 있지만,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을 위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원칙은 울면서 아파하는 것으로 화답하는 국민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교조는 학교 속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위해 조직의 운명을 바쳐야 한다. 전교조와 함께 학생들이 진심으로 울고 학부모들이 감동해 울 수 있을 때, 전교조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참교육'의 가치를 당당하게 구현할 수 있다.
참교육 1세대로서 전교조가 초심으로 돌아가길 진정으로 바란다. 전교조 선생님이기에 더 믿을 수 있었고 더욱 존경할 수 있었던 그 때의 전교조로 말이다. 1999년 1월 합법화 기자 회견문에서 전교조 스스로 이렇게 밝히지 않았는가.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교육적 입장에서 우리의 권익보다는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겠다. 참교육의 주체세력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개혁에 앞장설 것이며, 조합원 권익단체로 머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노 전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자신을 버렸듯이, 전교조는 '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라. 그 전제가 충족된다면 참교육 세대는 물론이거니와 국민들도 다시 전교조를 적극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