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일어나던 해인 2008년 2월, 나는 학교를 갓 졸업하고 4대보험도 안 되는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정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역사학과 출신이라 친일파로부터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 내 부패의 역사를 자세하게 배웠건만, 주로 시험답안지 채우는 데 쓰는 것에 그 지식의 의미를 두었을 뿐 배운 지식에 대한 현실감은 없었다.
솔직히 대학교 때 난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시험범위가 반으로 줄었을 텐데"라는 식의 농담을 즐겼다. 학교,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내게 한국전쟁과 박정희, 민주화 투쟁 등의 주제는 어쩌면 시험문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험 공부할 때 책으로 읽어야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운 좋게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한 '잃어버린 10년'(?)이 빛나던 나의 학창시절을 지켜줬기에 가능했던 생각들이었다. 생전 처음 투표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찍은 사람이 낙선하고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을 보면서 낙담은 했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지난 10년간 민주당이 해먹었으니, 한나라당이 좀 해도 되겠지."
야근하는 첫 직장에서 '정치'를 맛보다
생각보다 쉽게 취직했다. 토익점수 안 보는 직장만 골라서 이력서를 넣는 바람에 '밥 먹듯이' 야근하는 직장에 취직이 됐다. 처음 입사한 곳은 독서 관련 신문을 만드는 작은 회사, 다음에 들어간 곳은 서울 중심가에 있는 지역 신문사.
공교롭게도 이 직장에 첫 출근한 날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일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촛불이 처음 일어난 때 이 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정치는 국가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조그만 구역에서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했고, 권모술수를 부렸으며, 세력다툼과 밥그릇 싸움을 했다. 수습기자 신분이었지만 기자가 나를 포함해 2명밖에 없는 신문사였으므로, 구의원이나 국회의원들이 참석하는 행사에 종종 취재를 하러 가면 그런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조그마한 그 정치판에는 학교에서 배우던 친일파 '딴나라당'도 있었고, 조선시대마냥 국민들을 속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파는 정치인도 있었으며, 국민 고충을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봉급 올리기에 급급한 구의원들도 있었다. 역사책으로만 읽던 험악한 내용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절감한 순간, 저 정치인들이 정책을 잘못 입안하면 전혀 정치에 흥미 없는 나 같은 사람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들에게 끊임없이 투표하는 사람들이 내 이웃이고 내 친척이란 사실이 끔찍했다. 나는 현실에 대한 공포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에 저항하는 촛불을 밝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무자비한 진압으로 잠잠해진 촛불
학생 때 같으면 인터넷에 올라온 촛불 관련 글만 검색해 읽기만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잦은 야근으로 몸은 매우 피곤했지만 남자친구와 함께 수많은 촛불이 켜진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청계천 소라광장에 두 번 갔다. 그곳엔 검은 양복을 입고 자기 표를 호소하는 정치인 대신 하얀 도포 입고 후줄근하게 앉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의원이 있었고,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철새처럼 지지 세력을 옮겨 다니는 구의원 대신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의식 있는 시민들이 불의가 가린 세상을 촛불로 밝히고 있었다.
실제로 촛불이 언제까지 켜질지는 몰랐지만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멋대로 제시하는 정책에 순응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내게 일대 사건이었다. 조그만 지역 정치에 참여하던 그 사람들이 결국 정계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예전에는 민주화를 짓누르던 세력들이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라는 도식이 피부에 와 닿는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한 게 이즈음이었으니, 어쩌면 4·19 혁명이 이승만을 끌어내린 것처럼 뭔가 커다란 성과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나이도 9살이나 더 많은) 남자친구 아저씨가 정치 관련 이야기를 여러 가지 들려준 덕에, 나는 만화책을 보면서 공상만 하던 그 시절보다는 조금 더 의식 있는 젊은이가 되어갔다.
퇴근 시간이 거의 매일 밤 10시였던 신문사를 뛰쳐나와 퇴근 시간이 6~7시인 출판사로 이직한 다음부터는 한국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조중동이 말하는 논조로 '좌빨'을 경멸하는 기성세대를 불신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쌓기 위해 별로 읽지도 않던 신문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다들 들고 일어나니까, 역사적으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촛불은 무자비한 진압 끝에 잠잠해졌다. 이순신 장군 동상 주위에 컨테이너로 산성을 쌓는 유치한 발상을 한 사람들에 의해 촛불이 꺼져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만화책만 보던 내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다니...
일상에 치이다보니 머릿속에서 촛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촛불 이후에 좀 더 나아진 거라고는 시험공부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회과학 관련 책에 조금씩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내 삶에서 별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때,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또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노란 스티커, 노란 모자, 노란 풍선과 촛불이 함께 서울광장을 수놓았다. 1년 전 그날의 국민들은 광우병, 공기업 민영화 등 여러 민생 현안을 강압적으로 처리하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해 광화문으로 나왔고, 지금은 한국 역사상 그렇게 원칙적이고 정도를 가려던 대통령은 다시 없을 거라 되뇌며 슬픔과 애도 속에 나왔다. 서울광장, 광화문에는 지금도 촛불이 가득하다.
1년 전과 달리 내가 엄청나게 고양된 정신을 갖춘 지성인이 됐다거나, 세상을 옳게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초인이 되거나 한 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 대한 무심함도, 분노를 감추는 데도 능숙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일 뿐이다. 그래도 1년 전 지금과 비교할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생각하려 하고 주어진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 삐딱하게 볼 줄 아는 관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지금은 조금이나마 사회적 약자인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에 내 상상력을 쓰고 있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소심하긴 하지만 조금은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 새벽, 남자친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남긴 의문점을 규명해야 한다며 대한문 주변에 관련 내용이 담긴 프린트물을 붙이자고 했다. 졸린 와중에 투덜거리면서도 그를 따라나서 조용히 프린트물을 붙였다. 참 소심한 행동이지만, 겨우 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었다.
촛불 1년, 달라진 내 꿈을 발견하다
1년 전 촛불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도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 누그러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 가라앉는 와중에 우리에게, 특히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권력자들의 힘은 너무 강하고 그들의 지지자들도 너무 많다.
제 버릇 누구 못 준다고, 생각만 하던 나는 줄창 또 생각만 하게 될 것 같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바라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맞기 위해 1년 전 그 나날들과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자고 생각해본다. 시간 지나면 잊는 게 아니라 내 미약한 힘으로나마 수많은 국민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게 바로, 1년 전 설렁설렁 회사 다니면서 그림 그리고 공상하며 살고 싶다던 그때 꿈과는 조금 달라진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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