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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국전쟁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사진자료실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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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1일이즈음 서울시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이 없는 것과 의용군을 강제로 모집하는 것과 그리고 새로 생긴 말이지만 가장 많이 떠드는 전출 문제의 세 가지일 것이다.민(民)은 이식위천(以食爲天,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함)이니 만큼 무어니 무어니 해도 식량이 제일 큰 문제이다. 인민군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집집마다 식량을 조사하고 이를 뒤져내어서 마을의 굶는 사람에게도 나눠주고 남으면 자기네도 갖다 먹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의 약속은 1주일 안으로 식량 배급이 있다고 장담하였다.그러나 2주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무 데서도 식량배급이 있단 말을 못 들었고, 백성들도 이제는 아무도 이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게끔 되었다. 이북서 넘어온 친구들이 "것 보우, 계들이 하는 수작을 믿으문 못쓴다 하잖습니까"하고 여태껏 저들의 선전을 건성으로 들어온 우리를 책망하곤 한다.대한민국 시절에 쌀값이 2천원을 넘었다 해서 백성들이 아우성을 친 일이 어제런 듯한데 인민군이 들어온 후로 5천원 고개를 거짓말처럼 넘기고 이제는 만원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도 드러내놓고 불평을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앞뒷집이 모두 굶는다는 소문이고 온마을이 그런 것 같다. ……다음은 의용군의 강제 모집 문제… 당국은 그 조직적인 모든 기관을 동원하여 애국적인 청년남녀는 모두 의용군 대열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다. 마을에선 동민을 모아 보내고, 학교에선 학생들을 끌어 보내고, 직장에선 종업원을 채찍질해 보내고, 그래도 부족함인지 가두에서 젊은 사람을 붙들어 보낸다 하여 큰 공황들을 일으키고 있다. 이즈음 며칠은 그 때문에 그런지 거리에 젊은 사람의 내왕이 부쩍 줄어들었다.또 하나는 전출문제… 얼마 전에 이희승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반장회의에 시달이 있기를, 서울 시민 백오십만 중에서 오십만을 줄이고 백만만 남길 예정이라더니, 과연 이 며칠 동안 이곳저곳에 소위 전출명령이란 것이 내리어서 시내는 벌집을 쑤신 것 같다. 말인즉 꼭이 서울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을 지방의 농장과 공장, 혹은 광산으로 보낸다는 것인데, 명령이 내리면 몇 십 시간 안으로 떠나야 하고, 짐은 묶어놓으면 인민위원회에서 맡아두었다가 나중에 보내준다 하고 우선은 목적지에 가면 의식주가 다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나, 갑자기 이런 명령을 받아서 하룻밤 안으로 정든 집을 비워놓고 정처없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인 사람으로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하여도 시원치 않을 노릇이다. - 김성칠 지음 한 사학자의 6 ․ 25 일기 <역사 앞에서> 창비 95~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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