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믿을 수 없는 놀라움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노무현 서거 특보를 접하면서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죽음 자체가 슬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현실이 슬펐고, 또 그렇게 아름답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용기에 감동했다.
즐겨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에 국화꽃 한 송이 헌화하러 가야겠다고 썼고, 함께 갈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발인 하루 전 지인들과 함께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수많은 조문객들과 함께 고인의 하룻밤을 지켰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했다.
다름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서 그랬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맛있고, 멋진 정치를 보여줬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 정도의 예를 갖추는 일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부패와 배신, 정치공작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신념의 정치로 성공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일관된 신념을 지킨 정치인 노무현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펜으로 노무현을 비판했던 기자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는 내내 끊임없이 스스로 내 양심의 문제를 확인해야만 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진보를 자처하면서 펜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기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할 자격이 없는가? 슬퍼도 슬프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판은 고인에 대한 부당한 범죄행위였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온, 마찬가지로 펜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한 기자의 반성문과 같은 글을 보면서, 또 봉하마을에 취재 간 동료 기자들의 봉변 소식을 접하면서 '내 양심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괴로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이 진심으로 슬픈데 '나는 과연 슬퍼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니, 그 또한 진심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국민의 한 사람에게, 또 대한민국의 진보적 언론인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숙제가 됐다. 또 한겨레21 763호에 실린 '진보의 눈물은 왜 진한가'라는 기사에서 진보신당 부대변인의 "예전에 썼던 성명을 다시 읽어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어떤 부분은 야박했단 생각도 들었다"라는 말을 접하게 됐고, 숙제를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노무현의 끝없는 도전
돌이켜 볼 것도 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해서,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그렇고 퇴임 후에도 그렇고 비판의 글을 많이 썼다. 처음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사에 기록한 성과와 함께 그의 인간됨을 존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야박했다는 식의 부질없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부질없는 일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모든 노력을 한낱 감정의 사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고인은 그것을 원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현실과 싸우고 현실정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었다. 국민의 정부를 계승하면서도 국민의 정부의 한계였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자 했고, 임기 말에는 1987년 헌법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국민통합을 완성하고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1987년 체제까지 극복하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직접 1987년 체제 극복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국민의 정부로부터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1987년 체제 권력의 정점에 선 주인공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와 같은 태도가 진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바라는 신념 정치의 발로로 이해됐다. 1987년 체제의 끝자락에서 과거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하고 나아갈 길도 제대로 찾지 못해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의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탁월했다.
참여정부, 1987년 체제의 적자
직선제 도입과 국민의 정부 출범이 민주화 실현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서 1987년 체제의 국민통합력은 영남 지역주의에 반발한 호남 지역주의의 부흥으로 붕괴했다. 또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양극화로 이어졌고 국민통합의 기반은 더 빨리 해체되기 시작했다. 소득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등 전 분야에서 국민 공통성이 이전보다 더 극심하게 붕괴됐다. 직선제를 넘어서는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의 조건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은 1987년 체제가 국민의 정부로 완성된 것이 아님을 뜻했다. 결국 좌초했지만 참여정부는 1987년 체제에 근거한 국민통합을 위해 지역주의 극복과, 국가보안법 철폐 등 1987년 헌법 정신에 근거한 개혁입법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지난 10년 동안 1987년 체제에 근거한 국민통합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것은 참여정부가 유일하다. 1987년 이후 등장한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조차 진보적 국민통합의 문제를 외면해왔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민주노조운동의 호황기에도 국민통합은 재벌이 주도한 경제성장에 입각해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987년 체제의 국민통합력이 와해되면서 민주노조운동과 그 운동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운동의 한계도 분명해졌다. 진보정당의 창당과 함께 대기업 노조 이기주의 비판이 노동자들의 술자리 안주거리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은 1987년 체제 내에서 획득한 일정한 지분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면서 진보적 국민통합과 실질적 민주주의 완성의 과제를 외면했다.
진보적 국민통합의 측면에서 볼 때, 참여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이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1987년 체제의 일정 지분을 누리는 것에 만족했던 민주노조운동이나 진보정당보다 참여정부가 더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 부분이다. 또 이와 같은 차이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치 구도에 균열을 내며 집권할 수 있었던 반면 진보정당은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통합의 발목 잡은 양극화
그러나 결과를 놓고 봤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통합의 꿈도 실패했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07년 신년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양극화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세계화로 경쟁의 시장이 넓어지고, 지식기반 경제로 승자독식의 현상이 생겼다. 고용이 따르지 않는 성장, 파급이 없는 소비시장 현상이 양극화를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고 인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현실을 인정하고,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문제,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FTA한다고 신자유주의자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한미FTA의 의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출발점에서 WTO가 의제로 삼았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회투자국가 모델은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도 국내에서만큼은 동반성장, 상생협력, 균형발전의 함께 가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었지만, 전제가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인 국민 공통성을 근원부터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인 한 불가능한 꿈이었다.
결국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라던 1987년 체제에 근거한 국민통합의 꿈을 좌초시켰다. 애초부터 진보적 국민통합을 바라지 않았던 한나라당이 신자유주의에 열심히 협조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부족했지만 노무현만한 대통령은 없었다
참여정부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진보적 국민통합과 국민 공통성 실현을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완성이 중요한 과제다. 대통령 노무현이 아닌 정치인 노무현을 생각했을 때, 그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이 시대에 남기는 과제 또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불씨를 살린 것도 고인 스스로 민주주의가 갈 길이 먼데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과제 실현에 실패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더 심한 일이지만 현실이 각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현실정치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삶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왜 펜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냐고 묻는다면 그가 대통령이었고, 생각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처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토론과 비판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컨대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서 직접 조문까지 가서 애도하고 싶은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 뿐이다.
미래구상이 달랐고, 때문에 그의 생전에 날 선 비판의 칼날을 세웠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의 확고함을 믿고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 정치의 권위주의적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한 민주주의의 발전이 참여정부 시절에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라디오에서 혼자 말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들을 말이 있고 할 말이 있으면 국민과의 직접 대화를 서슴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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