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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을 뚫고 올라간  소나무가 있는 건물의 뒷모습.
지붕을 뚫고 올라간 소나무가 있는 건물의 뒷모습. ⓒ 안병기

엊그제, 신탄진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특이한 건물 한 채를 보았습니다. 아주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지붕 위로 우뚝 솟은 건물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건물의 뒷모습을  바라본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이 길을 지나치면서도 무심한 제 눈길이 그 특이한 풍경을 붙잡지 못한 것뿐이지요. 그동안 전 왜 이 특이한 건물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던 것일까요?

잠시 제 무신경함에 대해서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제 호기심은 자책하는 시간을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 소나무들이 지붕을 뚫고서 저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한 저는 건물로 가까이 다가가서 건물의 이모저모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움과 기능의 적절한 조화는 불가능

 지붕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 건물의 측면.
지붕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 건물의 측면. ⓒ 안병기

 건물 정면 외벽에 쌓아둔 덕석들.
건물 정면 외벽에 쌓아둔 덕석들. ⓒ 안병기

그 건물은 '토종닭 흑두부' 를 파는 음식점이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지붕 모양은 사면에 모두 지붕면이 있는 우진각지붕이더군요. 전·후면에서 볼 때는 사다리꼴 모양이고 측면에서 볼 때는 삼각형의 지붕 형태지요. 그래서 우진각지붕엔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을 뿐 내림마루가 없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작년 2월에 불타버린 '남대문'도 저런 지붕 형태였습니다. 해인사 장경판전도 그렇고요.

그러나 이 건물의 뒤쪽으로 달아낸 한 칸 크기의 건물은 정면과 달리 사모지붕이었습니다.  추녀마루처마 끝에서부터 경사지면서 중앙의 한 점에서 합쳐지는 형태지요. 그렇게 사각형의 평면을 이룬 지붕을 두고 사모지붕이라고 부릅니다. 불국사 관음전·창덕궁 연경당의 농수전·법주사 원통보전 지붕들도 저렇게 사모지붕이랍니다.

모르긴 해도 건축주은 이 건물을 지으면서 소나무들의 존재를 두고 햄릿처럼 한참 동안 고민했을 겁니다. 베어내느냐, 살리느냐? 그리고 마침내 소나무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을 겁니다. 소나무들이 서 있는 위치가 건물 중앙이 아닌 처마 끝이기 때문에 그렇게 건물에 큰 부담은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아름다움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기능이 처지고 기능에 중점을 두면 아름다움이 모자란다는 것이 건축가들이 늘상 당면하는 딜레마인지 모릅니다.

 지붕을 뚫고 우뚝 선 두 그루 소나무.
지붕을 뚫고 우뚝 선 두 그루 소나무. ⓒ 안병기

혹 일이관지 (一以貫之)란 말 아시는지요? 공자가 《논어》에서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라고 말한 데서 비롯한 말이랍니다. 한 가지 이치가 자신의 모든 가르침의 핵(核)을 꿰뚫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꺼낸 말이지요. 한 가지 이치란 충(忠)과 서(恕)를 가리지요.

하여간 저는 일찍부터 그 일이관지 (一以貫之)란 말에 확 끌렸습니다. 길고 거창한 줄거리를 가진 삶이라는 일물(一物)을 관통하는 한 가지 흐름을 콕 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말이 쉽지 일이관지 (一以貫之)란 게 저같은 평범 이하의 인간에게 어디 가당치나 한 일인지요?

 뒤에서 바라본 지붕. 완전한 우진각지붕도 사모지붕도 아닌 지붕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뒤에서 바라본 지붕. 완전한 우진각지붕도 사모지붕도 아닌 지붕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 안병기

그런데 하나의 건물 구조에서 지붕이란 어떤 위치를 점하는 것일까요? 지붕은 맨 꼭대기에 존재하면서 모든 건축 자재 위에 군림합니다. 자신의 발아래 기둥·대들보·서까래·창방 등 가구(架構)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건물의 실질적인 지배자라고나 할까요?

그날, 저는 지붕을 뚫고 상승하는 두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잠시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기존의 구조에 반기를 든 나무의 행위. 뚫는다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쾌감이 제 가슴을 관통하더군요. 저 소나무는 지붕만 뚫은 게 아니라 제 가슴까지 뚫은 거지요.

쾌감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치기어린 욕망이 슬쩍 고개를 쳐듭니다. 저도 저 소나무들처럼 나 자신의 상승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뚫고서 더 높은 곳을 지향하고 싶다는.

어쩌면 사람의 정신세계도 일종의 건축같은 체계를 이루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물론 정신 체계의 맨꼭대기에는 지붕이 있을 테지요. 사람들의 무분별한 욕망의 분출을 지그시 억누르고 있는. 그러니 건물에는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사람에게도 지붕이란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지요?

문득 지붕이 지닌 갸륵함에 대해 노래한 어느 시인의 시 몇 구절을 떠올립니다.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장석남 시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부분)

지붕 위로 솟구친 키 큰 소나무의 배웅을 받으면서 가던 길을 서두릅니다. 소나무와 지붕의 공생·공존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길 빌면서.

덧붙이는 글 | 6월 5일, 신탄진 가는 길에 우연히 지붕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고서 에세이 식으로 글을 붙여 봤습니다.



#지붕 #소나무 #일이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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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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