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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야! 이거 난민도 아니고….'

 

들썩들썩 광폭 질주하는 보트엔 자리를 꽉 메운 사람들로 편히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다. 소국 벨리즈에서도 작고 아름다운 섬 키 코커로 가는 바닷길에서 말이다. 초행길이라 어리뜩한 티 팍팍 내며 배에 오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뒷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것이 45분간의 낭패인 줄은 진정 난 몰랐다.

 

우선 보트 앞에는 보트용 천장이 있어 비와 볕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준다. 또 야간에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의 온기까지 더해져 추위에는 덜 민감하다. 하지만 뒷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흡사 바다 위의 아우토반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중에 비와 바람과 파도와 볕과 심지어 추위까지 온 몸으로 맞서야 한다. 마치 피안의 세계에서 홀로 낙오된 듯한 우울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섬에 내려도 바람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보트 위와 섬에서의 바람 속도가 다를 바 없었다. 엄청난 강풍이었다. 이 바람에 보트가 운행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험한 바람이 불어도 파도는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근처 멕시코 뚤룸 피라미드에서와 반대로 바람도 별로 없는 해변에 수 미터의 파도가 일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지막 배편이었으므로 금방 날이 어두워졌다. 먼저 숙소부터 정해야 했다. 빠듯한 경비로 최대한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 15달러 이상이다. 사실 텐트가 있었으므로 야영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생각까지 싹 씻어가는 강풍이었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더 괜찮은 숙소가 없으면 그대로 저렴한 호스텔로 가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뭐하는 거야?"

 

돌아보니 결혼기념일로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이곳으로 여행 온 조쉬와 제니퍼였다. 공공도서관에서 일을 한다는 이미지와는 별개로 그는 틀에 갇혀 살기보다 한없이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카리브 해를 찾아 휴가 온 것이었다. 이들과는 그 미어터지는 보트에서 만난 것이 인연의 전부다.

 

"섬 구경도 구경인데 일단 잠은 자야겠죠? 생각보다 저렴한 숙소 찾기가 쉽진 않네요."

"그래? 이 봐. 마침 우리가 머무는 방에 침대가 3개인데 생각 있으면 같이 자든지."

"커플의 로맨틱한 밤을 깰 용의는 없는걸요."

"우린 그냥 술만 먹고 잘 거야. 여기서 오래 머무를 계획이거든. 어때?"

 

조쉬의 제안을 거절할 만큼 혼자 궁색 떠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보트에서 그가 말했다. 혹시 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줄 테니 자기들한테 오라고. 내 경험상 미국인들은 그런 약속 꼭 지킨다. 유행어를 빌리자면 "백 프롬돠~."

 

조쉬가 머무는 방에 짐을 풀고 셋이서 섬을 거닐었다. 해변에서 떨어진 선착장으로부터 "꺄르르" 웃는 소리를 따라 어둠을 응시해 보니 하얀 빛이 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바다에 발을 담그고 수다를 떠는 어여쁜 메노나이트들이었다. 한 편에선 메노나이트 전통 복장으로 피구를 하는 여성들도 보였다. 얼마나 발랄하면서 아름다운가!

 

 

이미 아미쉬를 통해 익숙했던 그녀들과 잠깐의 인사대화를 나누고 또 정처 없이 걸었다. 쓸데없는 망상이지만 그들은 보수적인 신앙공동체로 대부분 같은 그룹 내에서 교제하고 혼인하기에 청년 가슴에 흔한 설렘의 한 줄기 빛조차 켜지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아주 우울한 사실은 그녀들은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키 코커는 수많은 연인들이 찾는 데이트 코스의 진리다. 한 여름 밤, 연인들에게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그리고 오렌지 빛 가로등 아래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 한 병이면 더 이상의 낭만은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 무리 속에 역시 또 나만 솔로다. 

 

섬의 중심지를 도는데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다 구경하게 된다. 그만큼 매력적인 작은 공간이다. 근처에 산 페드로라는 더 큰 섬이 있지만 여행자들은 이곳을 더 선호한다. 물가가 저렴하고, 특히 여행자 중 다이버들에게는 꿈에서라도 보고픈 가장 치명적인 유혹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거친 바람과 푸른 바다의 조화를 사랑하게 되는 섬. 이 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보 다이버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암초(Light house Reef)와 전 세계 다이버들의 선망의 대상인 블루 홀(Blue Hole)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지름 400m, 깊이 145m의 매직 홀이라 불리는 블루 홀은 종종 다이버들이 공기통의 산소가 다 사라질 때까지 구경하다 익사한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사고자 중 대부분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계에 몰입한 나머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육지와 영영 이별을 고한다는 얘기에 다소 엉뚱한 이유를 단 것이긴 한다.

 

어느 시니컬한 여행자로부터 "마지막 생에 최고의 희열을 느끼며 자살을 선택하려고 간 사람도 있을지 몰라"라는 이런 무서운 얘기도 들어 본 나로서는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울까 호기심도 간다.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고 이후 낚시 이외에 물에서 펼쳐지는 모든 레포츠를 근절하고 살아온 나이기에 블루 홀의 명미한 아름다움은 다른 여행자의 사진과 여행기로 접근하기로 했다. 역시 바다에서 우아하게 다이빙이나 스노클링 하는 것보다 정글 야생에 텐트 치는 게 내 적성에 맞으니깐.

 

출출해서 먹을거리를 찾아 걸어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긴 온통 자금이 회전하는 곳에 중국인들 천지다. 현지인들이 주로 노상에서 민예품이나 잡화점, 민박에 국한된 거에 비해 이들은 카리브 해의 이 작은 섬까지 진출해 레스토랑과 호텔, 마켓 등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어디를 가도 끈질긴 상인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적응력이 놀랍기만 하다. 물론 중국어를 잊지 않고 말이다. 덕분에 저녁은 제니퍼도 부담스러워 않는 좋아하는 중국식 볶음밥과 치킨으로 해결했다.

 

완전한 어둠에 잠긴 키 코커 섬에 바람소리와 바다 내음 만이 이 밤을 채우는 생경스러움이 좋다.

 

"데킬라 한 잔 들겠어?"

"콜라, 콜?"

 

피곤한 제니퍼를 먼저 보낸 조쉬는 여흥을 즐기고 싶어선지 나를 섬 끝에 위치한 바(Bar)로 데리고 갔다. 섬 중앙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그곳엔 젊음의 분위기가 후끈후끈 했다. 이곳은 섬에서 가장 시끌벅적했다. 자리를 잡고 술 한 잔 털어 넣는 조쉬를 뒤로하고 서양인들 사이로 나 홀로 당당히 들어갔다. 모두들 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벨리즈, #키 코커, #비전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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