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대학가를 흔들고 있다.
3일 서울대(124명)와 중앙대(68명) 교수들이 이명박 정부의 전면적인 국정 기조 쇄신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대구·경북(309명)과 부산·경남(161명), 충북대(80명) 등으로 선언에 동참하는 교수들이 날로 늘고 있다.
8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 교수 131명이 "최근 크게 위축된 언론·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현 정부의 국정기조를 바꿀 것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냈고, 서강대(45명)와 성균관대(35명) 교수들까지 가세했다.
정의로운 외침을 힘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정치권과 시민사회·학계·종교계가 두루 참여하는 6·10 범국민대회가 분수령을 이룰 것으로 보이는데,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처럼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의 집단행동이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유혈 시위진압에 항의하는 전국대학교수단 258명의 시위가 있은 뒤 이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은 1960년 4월의 사건은 교수 시국선언에 신화적 요소를 얹어줬다. 비도덕적인 권력이 지식인들의 정의로운 외침을 힘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이듬해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쥔 박정희 대통령의 등장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1965년 7월 12일 서울지역 교수 354명이 한일기본조약 조인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은 11개 대학 21명의 '정치교수들'을 추려내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14년 뒤 박 대통령이 살해될 때까지 교수 사회가 권력의 폭압에 숨죽이는 '암흑기'가 계속됐고, 박 대통령을 계승한 전두환 정권도 1980년 '민주화 요구'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 중 86명을 자퇴 형식으로 교단에서 내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치세도 정치민주화와 대학자율화를 요구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완전히 틀어막지는 못했다. 1986년 3월 28일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을 신호탄으로 한신대·서울대 등 35개 대학의 교수 910명이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이다.
동료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미처 참여하지 못했던 고려대 철학과 김용옥 교수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고칠 것을 고쳐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교단을 지킬 수 없다"며 사표를 던지고, 훗날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교수(경제학)가 학교가 요구하는 반성문 제출을 거부하다가 1년간의 영국 연수 기회를 포기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권력의 외면 속에 열기가 사그라지는 듯했던 1986년의 시국선언은 이듬해 48개 대학, 1510명이 참여하는 '민주화 쟁취' 시국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여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민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김영삼·김대중의 불화 덕에 군부 출신 노태우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던 6공화국 시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국선언의 '전성기'였다. 정권이 대학당국을 통해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고, 교수들은 형식적 민주화가 이뤄진 상황에서도 독재시대의 기득권층이 3당 합당 등의 편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현실에 저항했다.
3당 합당이 이뤄진 1990년에는 57개 대학 1041명의 교수들이 '보수 야합 정권'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고, 이듬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 사복체포조에 타살된 사건은 말 그대로 대학가를 들끓게 했다.
그해 5월 연일 대규모 거리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60개 대학 2600여 명의 교수들이 정부의 민주화 의지 부족을 질타하며 내각총사퇴와 공안통치 종식, 반민주악법 개폐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시국선언에 동참한 교수 중에는 '뉴라이트 운동의 대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방송 장악의 첨병'으로 비판받는 유재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현 KBS 이사장)도 있었다. 18년 전에는 거리로 나서는 학생들의 주장을 옹호하던 교수들이 지금에 와서는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지탄을 받는 이명박 정부의 편에 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학가 시위가 격화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노재봉 총리를 사퇴시켜 민심을 수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1997년 1월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안기부법 처리 규탄 시국선언에는 1400여 명, 2004년 3월 '노무현 탄핵 철회' 시국선언에는 1500명 이상의 교수들이 각각 참여했지만 적어도 참여인원에 있어서는 1991년 5월의 시국선언을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1991년 시국선언에 많은 교수들이 참여한 것은 강경대씨의 죽음 이후 분신 또는 투신으로 권력에 항의하는 제자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교수사회 구성원들의 자책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강씨의 죽음에 항의해 최초로 분신자살을 한 박승희씨의 전남대에서는 무려 714명의 교수들이 반정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단일 대학교의 교수들이 정치적인 이슈를 담은 시국선언에 이만큼 참여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번 시국선언 참여자 수는 1100명을 넘어서지금의 관심은 얼마나 많은 대학교수들이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변화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그 자체로 적잖은 상징성이 있지만, 시국선언 참여자가 많을수록 민심에 끼치는 영향과 정권이 느낄 부담감도 그만큼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명박 정부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론에 취해있는 듯하다.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에게 "서울대학교 교수가 모두 몇 명인 줄 아느냐? 전체교수 수가 1700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고 응답한 것이 정권 핵심부의 기류를 말해준다.
또한,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진보성향 교수단체인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이 주도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데, 민교협에 가입한 교수들의 수가 108개 대학 1500명 안팎(2007년 기준)이라는 점에서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온건·중도 성향 교수들까지 동조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다. 8일 현재 대학교수 시국선언 참여자 수는 1100명을 넘어섰다.
최홍재 공정언론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민주화 투쟁에 나선 제자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가 존재했던 1960년과 1987년의 상황이 지금 재현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고려대 인문계열 학과의 한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항의하는 2004년 시국선언 때만 하더라도 서울대와 고려대에서는 이만큼 많은 교수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며 "좀 더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명박 정부가 거꾸로 간다'는 지식인 사회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