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뿡뿡이, 밥 먹을 때는 조심하라 그랬지?"
"으~응"
"큰 뿡뿡이,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져야 돼."
"하하하."
밥상에서 아이가 뿌웅 하며 방귀를 뀐다. 욱,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며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 반경 일 미터 내외라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냄새는 내 콧속을 찌른 뒤다. 세 살 아들은 아직 말도 잘 못하면서 자신의 의사표현은 확실하다. 싫은 것은 싫다고 떼를 쓰고, 좋은 것은 천사 같은 미소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주변 반응을 유도하고 관심이 없을 때는 죽어도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반드시 관심을 끌어 놓고 표현을 해야 한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다. 주변인의 반응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표현하는 것이 생리적 현상이다. 쉬를 해놓고도 모른체 하거나, 방귀를 뀌거나, 이 두 가지는 남들이 의식할 필요도 없고 본인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옆에 누가 있든 말든 관계가 없다.
얼마 전에 있던 일이다. 하도 인상적이라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앉아서 기차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들. 바로 뒤 소파위에서 나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을 넘기려다가 아들이 눈에 살짝 들어 왔다. 내 시야의 경계에 살짝 걸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겠다.
곁눈으로 아들이 한쪽 엉덩이를 살짝 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신문에서 눈을 떼고 아들의 엉덩이 쪽을 바라본다. 두툼한 종이 기저귀 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 뽀오옹. 이어서 냄새도 내 코로 올라온다.
기가 찬다. 냄새 때문이 아니다. 25개월 인생의 길이로 방귀를 뀔 때 엉덩이를 드는 것은 스스로 터득한 것인가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분명히 제 몸속에 남아도는 가스를 몸 밖으로 내 보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일진데, 저 어린 것이 본인의 몸무게로 막혀있는 구멍을 제 몸을 기울임으로서 구멍의 길을 터주면, 보다 원활하게 가스 배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과학적 이치를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기가 찼다.
"이거 봐라."
"왜."
아내가 쳐다본다.
"얘, 엉덩이 들고 방귀 뀐다."
"……"
깊게 분석해 보지 않더라도 내가 보기엔 분명 학습에 의한 습득이다. 평소 방귀를 잘 뀌는 부인이 아이가 보는데서 엉덩이를 들고 뀌는 모습을 자주 연출한 탓이다. 출퇴근해서 주말과 밤에만 같이 있는데도 여러 번 목격한 터이다.
그렇다. 나의 아내는 방귀를 잘 뀐다. 외부 행사(?)나 모임, 집안에 손님이 있을 때는 절대 뀌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그 사실을 잘 아는 것은 장모님과 나, 아들 뿐이다. 이번 기사로 그 사실이 온천하에 드러나버리면 아내를 알던 사람들의 이미지에 변화가 생길지는 잘 모르겠다. 설마, 생리현상 때문에 사람의 인간성이나 됨됨이를 재평가하지는 않을 일이다. 하지만, 매일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이에게 방귀를 잘 뀌는 사람과 생활하는 것이란 스트레스가 많다. 특히, 코. 후각이 매우 괴로워진다.
스트레스를 피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이미 군시절 과감하게 그곳에 내던지고 나온 격언이라 생각하는 나는, 아내와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리적 현상에 대한 강압적인 억압은 인권탄압이라는 주장에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내 코를 좀 살려주십사 부탁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고육지책으로 몇 개월 전, 몇 가지 조항에 합의하기로 하였다.
첫째, (운행 중인 차 안에서) 차창이 닫힌 때엔 뀌지 않는다. 닫혀있는 경우엔 차창을 내리고 해갈한다.
둘째, 먹고 있거나, 마시고 있는 옆에 있을 경우엔 다소 귀찮더라도 5보 이상 거리를 이격 후에 뀐다.
셋째,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배출시 반드시 사과를 한다.
넷째, 규칙적인 배변습관으로 가스의 비축량을 줄이는 데 스스로가 노력한다.
위의 네가지 사항은 순전히 합의사항일 뿐이지 강제조항이 없으므로 요즘도 내 코의 혹사는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제는 귀가 더 괴롭다. 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엔 냄새에 대한 공포가 스며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하다. 하지만 소리없이 다가오는 '충격과 공포'가 더 가혹한 일이다.
이산화탄소배출권을 국가간에 사고 판다는데, 우리도 가스배출권을 사고 팔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며칠 전엔 한 개 조항을 추가하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아내의 묵비권으로 난항중이다. 내용인즉슨 아이랑 둘이 있을 때에도 아이의 코를 '배려'해 달라는 것. 하지만 '관찰자 혹은 감시자'가 없는 관계로 배출 당사자의 의지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실행조항이 되어 버린다.
검색창에 방귀로 검색을 해 본다. 혹시 방귀를 줄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냄새를 줄이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 하지만 곧 그만둔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방귀를 튼 것은 이미 연애할 때였다. 그러면서 더 가까워 졌고, 덕분에 나 역시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방귀를 뀔 수 있는 배출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당당하다. 아내가 나의 행위를 묻을 만큼의 양과 질(?)로 내 행위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이나 질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몸을 이해하고 그 몸이 건강할 수 있도록 조언과 도움을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근간에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마음을 다스린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가. 아, 한층 나의 성정(性情)이 고차원으로 향하는 듯 뿌듯함이 느껴진다.
"아들, 어디서 뿡했어?"
"어이."
"아이구, 잘 했어."
세 가족이 활짝 웃게 해주는 아들의 방귀는 어찌 보면 가족의 화목을 도와주는 촉매제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부패하는 물질에서 비롯한 냄새는 아름답지 않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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