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검찰과 국세청 등 이른바 권력기관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사정 정국'의 첫 단추를 꿰맨 국세청에도 거센 후폭풍이 몰아칠 전망이다. 전직 국세청장의 잇단 비리 혐의에 따른 구속에 이어, 한상률 전 청장의 친정권적 행태가 결국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정권교체 후, 국세청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말] |
"박연차 회장 사건은 어떻게 보면 이제 과거형이 됐고,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경우는 현재·미래진행형 아닌가…."
국내 재벌그룹 한 고위임원의 말이다. 그는 그룹 내 대외기획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5일 우연히 차를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 중 한 토막이다. 그의 일 가운데 하나는 정치권을 포함해 정부와 각계각층 인사 등을 두루 만나는 것이다.
그는 "요즘 같이 대외환경이 어려울 때일수록 국내 정치·사회가 안정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문제는 현 정부가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리더십도 없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 수준이 상당한데도 정부와 여당은 시간만 흘러가길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수성향의 재계인사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하자, "정치·사회적인 갈등이 커지고, 대북관계 등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기업하는 사람 처지에선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연차 회장보다 한상률 전 청장이 더 중요한 이유기업인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가 내놓은 해법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 처리 문제였다.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검찰의 과잉 수사 못지않게 한 전 청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에 대한 국민 불신을 하루빨리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 3일 국세청에 대한 6대 의혹을 제기하면서, 향후 국정조사나 특별검사 등을 통해 국세청 세무조사 전모를 밝히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
8일 오전에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의원들도, 국세청의 정치적 사찰 성격의 무리한 세무조사와 배경, 현 정권 실세들의 각종 연루 의혹 등을 제기하면서 연일 공세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지난달 28일 국세청 내부 직원이 전 청장에 대한 비판 글을 내부 통신망에 올린 것을 두고, 국세청이 최근 해임 또는 파면 등 중징계를 내리기로 결정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해당 직원은 국세청의 징계 결정에 반발해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자세여서 국세청 내부에서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세무조사와 관련해 한 전 청장에 집중된 의혹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다.
이미 야당 등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왜 국세청이 이미 2~3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뒤늦게 태광실업 등 박연차 전 회장의 주요계열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느냐다. 그것도 관할청인 부산지방국세청이 아닌 '국세청의 중수부'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동원하면서까지….
국세청 전직 고위간부는 최근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그 정도 규모(매출 3000억 원, 재계 순위 620위)의 회사에 대해 (서울청) 조사4국까지 동원해 넉 달 동안 조사한 것은 아무래도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한 청장보다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지난 4월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한 전 청장에게 태광실업 등에 대한 세무조사를 지시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박연차 리스트의 원본, '한상률 리스트'는 있나
또 하나는 세무조사 과정에서 한 전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내용을 직접 보고했는지, 어떤 내용을 지시받았는지 여부다. 또 국세청이 검찰에 세무조사 결과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을 누락했는지도 의문이다.
청와대는 작년 11월께 한 전 청장의 이 대통령 직보 여부에 대해 "그런 사실이 없다"고 공식 부인했지만, 정치권과 국세청 주변에선 이를 믿지 않는 분위기다. 박지원 의원은 "한 전 청장이 세무조사 결과를 민정수석실을 거치지 않고, 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말했다.
서울국세청 조사4국은 박 전 회장 개인의 탈세행위 등의 자료를 확보했고, 이 과정에서 박 전 회장 여비서의 수첩 등을 입수해 한 전 청장에게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의 원본'으로 알려진 것이 이것이다. 정치권에선 이를 두고 '한상률 리스트'라고도 한다.
또 세무조사 결과를 5개 항목으로 나눠 한 전 청장에게 보고했으며, 이 가운데 검찰에 넘어간 것은 3개 항목이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2개 항목에는 주로 현 여권 인사와 전, 현직 검찰 간부 등 권력기관 인사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지난달 검찰은 박연차 리스트의 원본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국세청에 대한 압수수색과 관련 인사 등에 대한 참고인 조사 등을 벌이기도 했다.
세 번째로 한 전 청장이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배후 여부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한 전 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건으로 현 정부로부터 나름대로 신임을 얻은 것으로 보였지만, 올해 초 뜻하지 않은 '그림 상납' 의혹과 부적절한 골프회동 사건이 불거지면서 낙마했다.
특히 작년 연말께 경주의 골프회동과 저녁식사 자리에는 이상득 의원과 친분 있는 포항지역 인사들과 이명박 대통령의 동서인 신아무개씨까지 동석했다. 청와대는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한 전 청장에게 구두로 주의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MB 취임 1년 만에 대통령 친인척 등 연루된 인사청탁비리?게다가 이 자리에서 한 전 청장이 '충성주'를 마시면서 '차기 국토해양부 장관 자리를 부탁했다'는 발언까지 나돌았지만, 한 전 청장은 올해 초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전면 부인했다.
이후, 그가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것은 지난 3월 15일. 이미 참여연대에서 한 전 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에 대해 검찰에 고발했지만,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검찰은 이때 대검 중수부를 동원해 본격적인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개시할 때였다.
<한겨레>는 지난 3일자 신문에서 일부 여당 의원의 말을 인용해, "한 전 청장을 정권의 핵심 실세 2명이 미국으로 내보낸 것으로 안다"고 보도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한상률 리스트에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들어 있으며, 죽은 권력에 서릿발을 내리기 위해 한 청장을 미국으로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전 청장을 둘러싼 의혹의 핵심은 과연 박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에 현 정권 실세가 얼마나 개입돼 있느냐다. 한 전 청장은 검찰의 이메일 조사에서 이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자신을 상대로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박연차-천신일-한상률'로 이어지는 세무조사 무마 로비 커넥션의 그림은 얼추 맞춰진 셈이다. 하지만 한 전 청장은 이상득 의원의 세무조사 지시 의혹과 자신의 기획 출국설 등에 대해선 뚜렷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전 청와대 비서관인 추부길씨를 구속하고, 천신일 회장과 일부 여당 정치인 등에 대해선 불구속 기소 처리하는 쪽으로 사건을 일단 마무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 전 청장에 대한 소환 여부에 대해선 구체적인 방침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 쪽에선 한 전 청장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향후 정치권에 끼칠 영향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자칫 대통령 친인척과 연루된 대형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는 폭발성 때문이다. 말 그대로 불씨만 당기면 어디로, 어떻게 불똥이 튀어 대형 화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전 청장은 지난달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3~5년 정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현 정부 임기 안에는 국내에 들어올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