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식당 이름과 음식 메뉴가 회화적이고, 상징적이어서 카메라에 담아두었던 사진인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관되게 펼쳤던 대북 포용정책의 성과를 그대로 반영하는 간판 같았습니다.
몇 년 전에 써넣은 것으로 보였는데요. 식당 주인의 마케팅 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개성공단 입주,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이 화해하고 공조하는 평화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더라면 감히 선택을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잃어버린 10년'이었다고 벅벅 우기면서 촛불을 두려워하는 이명박이나 한나라당, 자유민주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조갑제, 민족지라 자칭하는 <조선일보> 김대중 씨가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도 궁금했습니다.
영화관에 가서도 '간첩도 자수하면 양민'이라는 구호를 들어야 했고, '불안에 떨지말고 자수하여 광명찾자!'. '나라위해 간첩신고, 상금타자 20만원!'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거리에 난무하던 시절에 간판을 '평양 식당'이라고 했다면, 반공정신이 투철한 학생이나 시민의 신고로 주인은 물론 종업원도 몇 번은 경찰서 지하실에 다녀왔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국부였던 1976년에는 외래어 간판 단속, 1979년에는 입간판 단속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고 가로수를 잘라내는 등 자연을 훼손하며 '간판 전쟁'을 벌이는 재벌들은 놔두고, 가난뱅이들 상점 간판만 단속했습니다. 아니 성가시게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떼어내든가 봉투를 줘야 트집을 잡지 않았으니까요.
허름한 식당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요. 전두환 신군부 때 '평양 식당' 간판을 내걸었다면 최하가 보안법 위반, 아니면 26년 동안 짓눌러온 간첩의 굴레를 벗고 무죄를 선고받았던 '오송회'사건 이상의 간첩단조작 사건이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문·조작·날조가 통치의 수단이었으니 대선이나 총선이 다가오면 '평양 식당'이 남파된 북한 공작원들의 연락장소로 바뀌어 주인은 간첩연락망 총책으로. 단골손님 몇 명은 간첩으로 몰려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냈을 거니까요.
고기잡이 나갔다가 북방한계선을 넘는 바람에 북한 경비정에 단속되어 억류되었다 돌아와서 그에 상응하는 반공교육과 처벌을 받았음에도 훗날 간첩으로 몰려 젊음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어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니 얄궂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여유가 생기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는데요. 실제로 평양에 가면 거리에 백반을 파는 작은 식당이 있으며, 아침밥도 사먹을 수 있고, 과음했을 때 속 풀이에 그만인 '물메기탕'도 사먹을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마음 놓고 평양을 오갈 수 있을지···.
보신탕이냐? 뚝배기냐?
겉으로 보기에도 꽤 오래된 간판 같은데요. 그래도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음식도 맛깔스럽게 나올 것 같았습니다. 붉게 녹슬기 시작한 연통과 오래된 돗자리가 서정적이고 한적한 고향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식당 간판은 없고 메뉴만 너절하게 적어놓아 처음에는 헷갈렸습니다. 가장 최근에 쓴 것으로 보이는 '보신탕'이 주 메뉴이겠지만, '뚝배기', '감자탕', '국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펼침막의 '동태찌개'·'된장찌개'도 그렇고요.
지난겨울에 촬영했는데, 최근에 지나면서 보니까 그대로더군요. 겨울이나 여름이나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당 주인이 맛으로 승부를 내려는 것인지, 가난해서 그러는지도 종잡을 수 없었고요. 가게로 들어가 주인에게 간판을 어지럽게 써놓고도 타산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젓국집' 간판요즘은 군산 째보선창에 나가도 어부들의 고함소리와 만선을 알리는 오색 깃발은 볼 수 없고, 몇 개의 선구점과 철공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동남쪽 주택가로 50m 정도만 걸어가면 낡은 '젓당꼬'(탱크) 건물들이 선창가 동네였음을 확인해주고 있어 아쉬움이 덜합니다.
노란 바탕에 청색 페인트로 써놓은 젓국 집 간판은 볼수록 재미를 더하네요. 오른쪽 문짝에는 '젓'을, 왼쪽 문짝에는 '젓국'을 판다고 써놓았는데요. 양쪽 문가에 세로로 쓴 '가제미 젓국 팝니다.'도 띄어쓰기를 각각 달리하고 있습니다.
광고사 주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주인이 직접 쓴 것 같지도 않습니다. 추측건대 짓궂은 주인의 부탁을 받은 실력 있는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유와 해학이 넘칩니다. 한가하게 널린 빨래들도 나름대로 한몫을 하는 것 같군요.
붉은 함석지붕 벽에 '젓국 팝니다.'라고 써놓은 흰 페인트 글씨도 무척 오래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년 전에 촬영한 사진인데요. 지난달에 가봤더니 건물을 개축하면서 모두 사라졌더군요. 부근을 아무리 둘러봐도 '젓국'이라는 낱말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그나마 남아 있던 흔적이 모두 사라지니까, 가까운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했습니다.
'젓당꼬'는 일제강점기에 왜놈들이 지었으며 지금은 한두 개 남았습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봄에 황석어젓을 담아 가을에 팔았고, 추수철에는 '다꾸앙'(단무지)으로 대처해서 유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헐리거나 비어 있어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음산하더군요. 그나마 남은 빈 건물을 보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소개한 간판 외에도 출입문에 붕어빵, 호떡, 오뎅과 함께 번개탄을 판매한다고 어지럽게 적어놓은 가게도 있었고, 웰빙 다이어트라며 군고구마와 군밤을 함께 써넣은 드럼통, 총각 때 몇 번 가봤던 해망동 '굴 다방', 소설 탁류에서 초봉이가 점원으로 일하던 '제중당약국'을 떠올리게 하는 '영신당 한약방'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