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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의 악마> 겉표지
<벨벳의 악마>겉표지 ⓒ 고려원북스

역사 미스터리와 시간여행. 이 두 가지는 안 어울리는 조합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역사 미스터리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의문의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소 황당하지만, 과거의 일을 정확히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당시로 시간여행을 해서 넘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추리작가 존 딕슨 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에 집착하다보면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진상을 밝혀줄만한 자료가 없다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서라도 사건의 전모를 알아내고 싶은 것이 추리작가의 본성 아닐까.

 

물론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이상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존 딕슨 카는 1951년 작품 <벨벳의 악마>에서 독특한 시간여행 방법을 사용한다. 인간의 육체는 그대로 현재에 남겨둔 채, 그의 정신만을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벨벳의 악마>의 무대는 1925년의 런던. 캠브리지 대학의 역사학 교수 니콜라스 펜튼은 1675년 6월에 발생했던 잔인한 살인사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한 펜튼의 관심은 거의 병적이라 할 정도다. 하지만 당시의 문헌과 관련자료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누가 그 사건의 범인인지, 동기는 무엇이었는지가 나와있지 않다.

 

240년 전의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는 교수

 

펜튼이 과거의 사건에 집착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사건은 지금 펜튼이 살고 있는 고풍스러운 대저택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그 저택의 주인 이름도 똑같은 니콜라스 펜튼이었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이런 점에 매료되어서 인지, 현재의 펜튼은 당시 살인사건의 세부사항을 추리하기 위해서 범죄학과 법의학 강의까지 들을 정도로 열성적이다. 그렇더라도 과거의 일을 지금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니콜라스 펜튼은 더이상 호기심을 견디지 못해서 악마를 불러내고 자신의 영혼을 팔겠다는 제안을 한다.

 

영혼을 파는 대가는 간단하다. 자신의 정신을 1675년으로 보내달라는 것이다. 240년 전 이 저택에 살았던 니콜라스 펜튼의 육체에 자신의 정신이 삽입되는 것이다. 과거 펜튼의 몸을 입되 의식과 지식, 경험, 기억은 현재의 자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서도 심각한 부상이나 질병에 직면해서도 안 되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악마는 이 모든 조건을 순순히 들어준다. 펜튼이 과거로 가려고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 살인사건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꾼다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은 유구한 역사속에서 사소한 일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있을까.

 

악마는 이에 대해서 모호한 대답을 한다.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여기저기 사소한 것들은 손댈 수 있다. 특히 가정문제 같은 것들은. 하지만 어떻게 하건 최종적인 결과는 같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격려를 잊지 않는다. 마음껏 시험해 보라고.

 

이렇게해서 니콜라스 펜튼은 단 하룻밤 사이에 240년을 뛰어넘어 과거로 날아간다. 같은 런던의 같은 집이라지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의 육체는 젊어져있고 주위에는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있다. 독한 맥주와 포도주는 입에 안맞고 화장실도 불편하기만 하다. 특히 당시의 관습과 말투를 익히는 것이 힘들다. 펜튼은 이 모든 것에 적응하며 오직 한가지에만 집중한다. 과연 이 집에서 발생하고 있는 어두운 음모와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

 

추리작가가 그려내는 17세기의 영국

 

존 딕슨 카는 '밀실과 괴기'의 대가이지만, 후반기에 와서는 역사 미스터리를 많이 발표한다. <벨벳의 악마>는 그 중에서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특기인 불가능 범죄나 괴기취향이 스며있지 않다. 악마가 등장하지만 온화한 신사처럼 묘사되고, 240년 전의 살인사건은 음흉한 독살일 뿐이다.

 

대신에 작가는 17세기 후반의 인물과 정경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때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하던 시기로 작품에는 국왕 찰스 2세와 셰프츠베리 경을 포함해서 많은 실존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검술과 화법, 예법, 의복, 음주법 등 당시의 관습들도 상세하게 그려진다. 작품을 읽다보면 왁자지껄한 선술집의 풍경, 지저분한 런던의 뒷골목과 대저택의 지하실이 떠오른다.

 

하지만 존 딕슨 카는 미스터리 작가인 만큼 그런 요소들도 빼놓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간 펜튼은 저택의 음모를 추적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당당하게 맞선다. 많은 인물과 사소한 일들이 뒤섞여 나아가다가 마지막에 전모가 밝혀지는 구성도 역시 마찬가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과거로 간다는 것은, 타임머신을 만들어내는 것 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어떻게 악마를 불러낼 수 있었는지를 포함해서 몇 가지 납득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 작품은 독특한 소재를 다룬 독창적인 역사 미스터리다. 존 딕슨 카 특유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덧붙이는 글 | <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 유소영 옮김. 고려원북스 펴냄.


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 고려원북스(2009)


#벨벳의 악마#존 딕슨 카#역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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