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로 접어들자 아파트 화단과 동네 산이 온통 진녹색이다. 날이 더워지면서 내 손바닥의 꺼풀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여름마다 찾아오는 주부습진처럼, 어느 때부턴가 방학도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어김없이 찾아온다.
3월 신학기가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벌써 대학은 벌써 1학기 종강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땐 '종강=천국'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종강이 지옥 같다. 시간강의를 하는 남편을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니 방학은 학문(學問)을 풀어놓는 방(放)이 결코 아니었다.
방학이면 '빙하기' 맞는 전국 대학강사들
방학이 되자마자 멋대로 방기(放棄)되는 한 무리가 대한민국 대학의 강사들이다. 전국 대학의 40% 이상이 비정규직인 시간강사들의 강의로 채워지고 있다는 건 지금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요즘 계속 언론에 보도되는 노동자 연대투쟁 따위의 뉴스를 보고 있자면 나는 그들이 함께 뭉치는 것만으로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힘들지만 작은 힘들을 조금씩 보태서 화합을 이끌어내고 자신들의 일터를 지켜내는 모습들이 처절하지만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방학으로 일년에 거의 반인 5~6개월 동안 생계비가 뚝 끊어지는 상황을 철마다 감내하면서도 시간강사들은 잘 뭉치지 않는다. 모두가 '똑똑하고' 지성인이라는 자존심 탓도 있겠다. 노조가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자신도 교수가 될 텐데, 번거롭고 복잡한 일에 굳이 뛰어들어 일을 그르치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일 게다.
기말시험이 끝나면서 곧바로 방학에 들어가는 대학의 강사들은 '빙하기'같은 방학을 어떻게 견뎌낼까? 대부분의 강사들과 그 가족들은 한여름에도 한겨울 못지않은 냉혹한 현실을 맞서며 잔뜩 움츠러든다. 조선시대 양반 상놈이 갈리듯 대학은 교수와 강사로 갈려있다. 물론, 양반 족보를 돈 주고 사듯이 교수직을 산다는 소문도 어렵지 않게 듣기도 한다.
연줄 잡아도 힘들다는 교수 타이틀...늦깎이에다 고지식한 남편
알고 지내는 분 중에 글쓰기 학원을 하는 K가 있다. 그분 남편이 대학 강사라는 걸 알고부터 우리는 동병상련이 되었다. K의 남편은 학위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규직 교수가 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자꾸 일이 어그러지면서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교수와 강사의 경계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정규교수의 꿈은 점점 멀어졌단다.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내공'이 쌓여 많이 극복되고 평온해졌다고 한다. K는 그 당시 '남편이 교수가 되면 나는 우아하게 글만 써야지'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둘이 마주보며 웃었지만 그 말이 어찌 K만의 소망일까 싶어 웃음 끝이 헛헛했다.
학벌과 연줄이 있는 사람도 이럴진대, 남편은 주변머리도 없는 데다가 남의 일을 내 일보다 먼저 챙기는 실속 없는 '짓'을 종종 저지른다. 공부하려고 모이는 사람들을 그저 고마워하며 먼 곳까지 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가 하면, '나눔의 집' 소식지에 수년간 원고료 없는 글을 올린다.
마누라 소견에 조금만 '머리'를 쓰면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것들에는 별 재주가 없는 것 같다. 늦게 시작한 공부에 학위심사도 두 번 정도 받으면 될 것을 '요령'(?)없이 고지식하게 다시 해보겠다고 해서 3차에 걸쳐 심사를 받았다.
그런 남편이 공부(학문)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 돈(경제)이 최고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어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지금쯤 집도 있고 자동차도 굴리고 다녔을 직장을 접고 느지막이 학문의 길에 들어선 남편. 그가 공부를 하는 동안 동생들은 형의 학비를 댔다. 결혼 후 시댁과 친정에서는 집안의 대소사에 부담해야 될 몫들을 지금도 형제들이 떠맡는 형편이다.
그가 조금만 약삭빠르게 움직였다면 지금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남편은 그래서 곰처럼 미련하다. 게다가 '촌놈기질'까지 있어서 계산에 어둡다. 성과가 미미해도 이쪽저쪽 들쑤시기보다는 한 우물을 파는 데 집중하는 편이다.
시간당 3만원도 못 받지만 그래도 남편의 미련한 힘을 믿는다두 아이들이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을 때 남편이 학위를 받았다. 그때, 우리는 경기도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방학이 되어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그마한 일자리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맘에 걸리는 것'이 아주 없지 않았다. 막상 그 일을 하기로 했을 때 우리는 그 결정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타격은 엄청나게 밀려왔다.
남편은 다시 이 학교 저 학교를 오가며 강의를 했고 새벽엔 우유를 배달했다. 운동하며 돈도 벌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겨울방학 새벽의 미끄러운 빙판길을 살피며 어설프게 움직이는 남편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배달하며 여분으로 남는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둔 어느 날, 속사정을 모르는 작은애가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에 왜 00우유가 많아? 난 **우유가 좋은데. 다음부터는 **우유를 사줘." 올 여름방학은 그동안의 방학보다 훨씬 두렵게 다가온다. 8월 중순이 지나면서 대학생들은 2학기 등록금을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 공약이었던 반값등록금 얘기는 화려한 공약으로, 허공으로 밀려왔다 구름처럼 사라졌다. 반값은 고사하고 대학에서는 등록금을 동결했다는 것만으로 유세를 떤다. 현재 지방 사립대 시간당 강사료는 3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강사들의 강사료는 조족지혈로 거의 제자리이거나 찔끔 오를 뿐이다.
곧 방학이다. 우리는 조만간 친정집이 있는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간다. 이번 이사는 결혼 20년차 열두 번째로, 처가살이 비슷한 생활로 접어들 것이다.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로 남아있는 수많은 시간강사들. 어쩜 남편은 처음부터 '승천'을 꿈꾸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러나 꼭 승천이 아니더라도 저들의 힘이 우리 사회를 한층 성숙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빙하기가 지난 자리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는 따스한 봄날을 기대하는 건 남편의 미련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