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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촛불이 꺼지자 나는 촛불을 다시 켰다. 그리고 또다시 촛불을 켜고 또 켜고 했다. 그런 식으로 촛불은 여러 번 꺼졌다. 그리고는 내가 네 살이나 더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푸른 옷을 입은 어릿광대가 나에게로 왔고, 내 어깨에 자기 팔을 둘러 감싸주었다. 나는 온몸이 아팠다. 노란 옷을 입은 어릿광대도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가 더 먹었던 네 살의 나이를 떨어버렸다. 다 시시하게 느껴졌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주인공 모모가 가사(假死) 상태를 들락거리는 로자 아줌마를 최후의 은신처인 유태인 동굴(로자 아줌마가 지하실에 만들어 놓은 은밀한 공간)로 옮겨 놓고 곁을 지키는 장면이다.

 

그러나 모모가 촛불을 밝히며 지키던 로자 아줌마의 육신은 이미 차갑게 식은지 오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모는 그녀의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주며 무언의 저항을 한다. 마치 죽음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불가항력적 존재에 맞서 싸우기라도 하듯이. 어쩌면 모모가 꺼져 가는 촛불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는 것도 점점 짙어가는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려는 의지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 향수, 화장품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음을 삶으로 포장하기 위한 기만적 도구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엽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모모의 순수성,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주의 깊에 보아야 할 단어가 바로 '어릿광대'다. 모모가 서커스에서 처음 보았던 푸른옷, 노란옷을 입은 어릿광대의 이미지가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아마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비애가 깃들어 있는 유년기를 환기하는 이미지가 아닌가 싶다.

 

한편 "하늘의 해는 노란 옷을 입은 어릿광대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138쪽)는 구절을 토대로 오늘 인용한 구절에서 "노란옷을 입은 어릿광대"를 태양으로, "푸른옷을 입은 광대"를 달로 해석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하면 태양과 달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 즉 시간을 은유하는 이미지가 생성된다.

 

물론 이런 해석은 문맥에 상관 없이 주어진 구절에 문학적 상상력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문장력을 배양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문예출판사, 1988, 2000, 지정숙 譯)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2003)


#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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