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동인은 '경제성장'에 대한 대국민적 염원이었다(경제활성화 57%-양극화해소 15%, 문화일보, 2007/11/01). 그것은 단순히 '잘 살겠다'라는 의지가 아니라, '더 잘 살고 싶다'라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복지국가로의 갈 길이 요원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대다수의 국민이 보여준 것은 성장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었다. 빈곤문제와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논의는 그 대다수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 속에서도 경제성장을 바라는 국민
비록 노무현 정부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강수까지 두어가면서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는 '분배중심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참여정부 당시 재경부는 수없이 많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러한 국민적 정서를 재확인했다([사설]재경부 '28번의 인터넷 여론조사' 왜 했나, 동아일보, 2006/02/01). 양극화가 저성장과 고실업을 낳았다는 정부와 경제학자들의 진지한 고민은, 성장에 대한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국민을 욕할 것인가.
2007년 동아일보에서 수행한 '국민여론조사 빈도표'는 이러한 국민적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다(동아일보, 2007/03/30). '향후 5년 후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변할 것 같느냐'는 질문에 스스로를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대다수는 '변화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상류층의 대다수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답했고, 빈곤층조차 '변화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 주를 이뤘다. 국민들이 체감한 경제적 현실은 경제가 나빠졌다는 실망이 아니라, 경제성장이 멈추었다라는 아쉬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민여론은 2009년 앞으로의 살림살이가 '나빠질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세계일보, 2009/01/29). 이제 프레임이 변한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2007년 대다수의 국민은 '비효율적 정치구조'를 1순위로, '불안정한 노사관계'를 2순위로, '소득 양극화 심화'를 3순위로 꼽았다. 정치/사회적 이슈를 제외하면 경제적 이슈로는 '소득 양극화'가 경제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된 것이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뉴민주당 선언' 비판
최근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은 '뉴민주당 선언'을 비평하는 글에서 양극화라는 프레임을 빈곤해소(개선)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민주당 선언 비평 3 : 양극화 프레임을 버려야 민주당이 산다.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 2009/06/18). 그는 양극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허수아비를 때리는 일이며, 한국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면 양극화 프레임은 격차의 크기에만 주목하고 그 성격은 버림으로써 결국 국민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경제적 양극화'가 시대정신인 것은 맞지만 이는 뻔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양극화'라는 말을 '빈곤해소'로 바꾸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빈곤해소라는 말이 함의하는 분배중심적 경제정책이야 말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힘들게 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바로 그 '국민'들이 불신했던 프레임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여기에 민주당이 고민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양극화라는 절대적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여전히 성장을 바라는 국민들을 설득시킬 묘안을 찾기 위해 민주당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고민 속에서 홍종학 교수와 최재천 전 의원은 '성장친화형 진보'라는 화두를 던졌다(
'뉴민주당선언'은 성장친화적일까?, 오마이뉴스, 2009/06/11).
결국 '뉴민주당 선언'이 우경화되었다는 우려는 다시 '성장'과 '분배'라는 낡은 프레임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를 '포용적 성장'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표현했고, 김대호 소장은 여전히 '분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엔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국민들 모두가 이제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프레임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잔재해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양극화라는 프레임이 '편광안경'에 불과하다는 김대호 소장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위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양극화'라는 프레임 속으로 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한 것이 양극화의 원인이라고 대다수의 국민이 생각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현 경제성장을 상징했던 금융의 위기야말로 '양극화'의 원인이었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성장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우울하게 바라보는 국민들의 정서가 이를 대변해준다.
대부분의 제국과 국가들이 경제적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거대담론을 논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불신을 낳았던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금 우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상을 끌어안을 수 있는 길은 양극화와 성장이라는 프레임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비록 김대호 소장이 잔인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공정한 경쟁에 의해 만들어진 격차를 강조하는 것은 참여정부의 양극화에 대한 강조를 비난하고 매도했던 보수우익들의 논리구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은 먹자골목에서 고객이 줄을 길게 서는 식당과 파리 날리는 식당처럼,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고객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격차도 있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교통수단의 발달, 소비자 선택권의 강화로 인해 이런 류의 격차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데, 웬만큼 격차가 크지 않고서는 국가의 규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뉴민주당 선언 비평 3 : 양극화 프레임을 버려야 민주당이 산다.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 2009/06/18)
사람은 자질과 심성이 다르게 태어나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선호체계를 가지고 선택을 하게 되므로, 그 상승 작용의 결과들에서 격차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격차는 사회로 하여금 다양성과 역동성을 갖게 하고, 이를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격차가 과도하거나 그대로 굳어 버린다면, 이를 즐겁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양극화 해소가 최우선 국정 과제인가? 장대홍, 자유기업원 에시이, 2006/03/06)
이제 여기서 우리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은, 성장을 끌어안을 것이냐, 분배를 다시 추구할 것이냐는 선택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경제활성화라는 갈증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바로 그 대다수의 국민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전히 국민들의 염원은 경제성장에 있다. 그리고 분명 민주당은 비록 정치적이었이지만 진지하게 이 점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은 아닌 것이다(또한 필자는 민주당의 지지자도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양극화가 모든 것의 원인임을 조금 더 래디컬하게 파고들지 않은 민주당의 철학에 실망을 느낀다.
김대호 소장은 "한나라당과 범보수를 모든 면에서 능가하는 정치세력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정치세력은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고, 다시금 돌아선 국민들을 포함한다. 노무현이라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국민들이, 왜 참여정부 시절에는 그를 욕했는지 우리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바로 김대호 소장이 말한 그대로다. 우리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특히 김대호 소장이 민주당의 양극화 프레임을 향해 날린 포화는 그 표적이 빗나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분배의 문제는 현 정부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지, 별다른 힘도 없는 민주당에게 요구해야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노무현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를 반성적으로 재고해야할 의무는 있으되, 정부가 추진해야 할 분배의 문제에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매달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노무현 현상] 이명박 정부, 약자 배려·소통과 통합의 정치 필요, 한국일보, 2009/06/01).
김대호 소장의 논리를 그대로 맞받아치자면, 빈곤해소라는 프레임은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또한 너무나 뻔한 말인 것이다. 그리고 정권을 되찾아와야만 하는 민주당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이유로라도 그들은 참여정부가 실패한 지점, 그리고 이명박 후보가 성공했던 그 지점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여전히 양극화라는 프레임을 통해 민주당이 노무현의 유산을 버리지 않았음은 분명해졌다. 문제는 인간적으론 노무현 대통령의 편에서, 현실속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편에서 갈등하는 국민에게 다가서는 일이다. 그리고 그 핵심엔 경제성장이라는 필연적 화두가 놓여 있다.
여전히 문제는 양극화에 있다
따라서 민주당에게 생산적인 조언을 하면서, 범진보세력을 규합하려는 김대호 소장의 주장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는 일이다. 국민의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방법은 빈곤의 해소라는 문제보다는 경제성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민들을 양극화라는 화두를 지키면서 끌어 안는 것이다. '뉴민주당 선언'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양극화'라는 프레임의 강조에서가 아니라, '양극화'라는 프레임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 점에서일 것이다. 차라리 분배의 문제를 논하려면 사회당의 기본소득처럼 급진적인 논의를 키워나가라. 그것이 빈곤해소라는 프레임보다는 국민 모두를 끌어 안는 길 아니겠는가.
멱함수 법칙에 지배 받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견고하면서도 쉽게 파국을 맞는다. 대부분의 링크를 소수의 노드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파국의 결과를 현재의 금융위기로부터 목도하고 있다. 멱함수 법칙이 지배하는 네트워크의 세상은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는 철저한 양극화의 세계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겨우 하나 혹은 두개의 링크를 갖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파워로를 그리는 네트워크를 바꾸는 일은, 곡선의 왼쪽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최빈값을 가지는 노드들을 성장시켜 아름다운 종곡선을 그리는 일이다. 국민은 그 아름다움을 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http://heterosis.tistory.com/ 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