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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와 여린 것들 고추를 비롯한 작고 여린 것들이 자라고 있어요. 허나 참외 싹이 터져 나오지 않으니 속이 상해요.
고추와 여린 것들고추를 비롯한 작고 여린 것들이 자라고 있어요. 허나 참외 싹이 터져 나오지 않으니 속이 상해요. ⓒ 권성권

집 아래 삽 한 자루 되는 작은 텃밭에는 고추와 토마토, 오이와 호박과 가지, 그리고 상추와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고추와 토마토는 내 키만큼 클 정도로 잘 자랐다. 오이와 호박과 가지와 옥수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참외는 전반적으로 깜깜 무소식이다.

 

그네들 모두는 한 달하고도 달포 가량 앞서서 심고 뿌린 것들이다. 사실 그 텃밭조차도 케케묵은 데다 똥과 오줌으로 냄새나는 땅이었다. 종종 아래층에 사는 개들이 그곳을 화장실로 여긴 탓에 맘껏 싸고 내질렀던 것이다. 그 땅을 개량할 요량으로 삽 한 자루를 들고 갈고 엎어서 똥을 치우고 풀을 뽑았다. 그리곤 작은 돌들을 치워내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명색이 그럴듯한 텃밭을 만든 셈이었다. 차차 이랑을 따라 장터에서 사 온 고추와 토마토 모종들을 심었다. 세 그루 아니면 네 그루가 다였다. 가장자리 건너편 쪽으론 오이와 호박과 가지를 한 그루씩을 심었고, 맞은편 가장자리 쪽으로는 옥수수와 상추와 참외 씨를 차례로 심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것들을 돌보았다. 때로는 산에 올라가 떠온 약수도 부어 주었다. 장터 나가 퇴비를 사서 뿌려 주기도 했다. 잡초가 나올라치면 앞서 뽑아 주었다. 그저 작고 여린 것들을 돌보듯 내 손이 가지 않는 게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듯, 잘 자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웬걸 녀석들은 한결같지 않았다. 15일쯤 되니까 고추와 토마토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잠잠하던 오이와 호박은 30일쯤 지나서야 순이 오르기 시작했다. 상추는 씨앗을 뿌린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새싹이 올라왔다. 옥수수는 그 다음에 새싹이 나왔는데 지금은 오이를 따라 잡을 정도로 쑥쑥 뻗어가고 있다.

 

키큰 오이 담장너머로 오이가 뻗어갈 것 같아요.
키큰 오이담장너머로 오이가 뻗어갈 것 같아요. ⓒ 권성권

내 속이 타는 것은 참외 씨앗이다. 녀석이 이제서야 새싹을 내놓는가 싶다. 그런데도 15개 정도 되는 씨앗을 뿌렸는데 단 두 개만 올라왔을 뿐이다. 어찌해야 좋을지 도통 고민이다. 이전에 뿌린 씨앗들을 한 번 뒤집어 엎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그것들을 무시한 채 새로 얻어다가 뿌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참외 씨는 다른 것보다 제일 늦게 나오는 법이죠. 기다려 보시죠."

"호박과 오이도 이젠 제법 줄기가 올라오고 있는데, 왜 그건 늦는 거죠?"

"다 때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외 씨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어떤 분이 해 준 이야기였다. 그 말 한 마디에 녀석 때문에 응어리졌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녀석의 잎이 터져 나올 때까지 그래서 나는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비단 그것은 참외 씨만 그런 것은 아닐 터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번 제대로 엎고 뿌린 씨앗은 각 씨앗의 특성마다 다르게 나오듯이, 인생이 터지는 때도 마찬가지이 싶다. 고추와 토마토처럼 빨리 올라오는 인생도 있을 것이고, 참외처럼 도무지 때가 보이지 않는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내 억지로 헤집는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요, 뽑아 올려본다고 올라올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도무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선한 마음을 품고 최선을 다하면, 때가 되어 잎을 내고 열매를 내 놓을 것이다. 기다리자.


#고추와 토마토#호박과 오히#상추와 참외#작고 여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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