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이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이 글은 <법보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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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로서 '불살생'
"목숨을 해치는 것이 차안(此岸)이요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이 피안(彼岸)이다." (잡아함경)
새삼스러운 얘기가 되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입니다. 이상향으로서 피안은 사후의 세계이거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임을, 아니 이곳이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오직 이 순간'을 강조하는 조사선(祖師禪)의 전통도 기실은 부처님 가르침의 현실적 기반 위에 놓여 있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듯이 모든 불교 계율의 으뜸은 '불살생'입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의 실천 덕목일 뿐 아니라 불교의 궁극적 지향, 즉 '해탈'의 길입니다.
'자비'는 '불살생'의 적극적 표현입니다. 불교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지장보살은 열반을 미루고 자비를 택했습니다. 사실 이때의 자비와 열반은 둘이 아닙니다. 대승불교의 '자비'를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보는 것이 옳겠지요.
그런데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른 생명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모든 유정(有情)의 운명적 모순입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먹는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먹는 것입니다. 여기서 채식과 육식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생명체든 다른 생명에 빚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생명의 질서이자 자연의 섭리입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인간도 지구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끝 모를 탐욕입니다. 여기서 인간사의 비극과 지구의 재앙이 비롯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살생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단 한 번의 호흡과 한 모금의 물을 통해서도 수많은 생명의 생사가 갈립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까지 살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런 생명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인류는 그러한 자연스런 생명의 질서에서 너무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합니다.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목숨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기와 자비 즉 사물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불살생의 실천은 불교 신행의 두 기둥입니다. 불살생의 실천 없이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감사'로서 '불살생'
땅과 물, 햇볕과 바람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은 땅과 물, 햇볕, 바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수화풍 사대로부터 와서 사대로 돌아간다는 말은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사실에 부합합니다.
불살생의 실천자는 '돌멩이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강바닥에 돌멩이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그곳에 알을 낳습니다. 돌멩이가 물고기의 자궁이자 요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물고기가 굶주린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어찌 돌멩이가 무정물이라 하여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먹는 건강한 채소는 땅을 비옥하게 한 지렁이 덕분이라면, 지렁이의 꿈틀거림이 사실은 내 목숨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미물이라고 부르는 유정과 맺은 관계도 이러하거늘, 우리 삶의 터전인 산하대지와 맺는 관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정부는 산하대지에 대한 감사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는 대규모의 살생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4대강 살리기'로 이름을 바꾸어 강행하려 합니다. 결코 의혹의 눈길이 아닙니다. 수량 확보를 위해 16개의 수중보를 만든다고 합니다. 물 흐름이 느려지고 조류가 생성되어 강물이 오염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강바닥에서 5.9억 평방미터의 모래를 파내겠다고 합니다. 물고기 서식지를 비롯한 수중 생태계의 파괴는 불가피합니다.
강변과 둑은 콘크리트로 덮겠답니다. 자연의 자체적인 자정 능력을 거세해 버리겠다는 얘깁니다. 이런 대규모의 국토 유린과 살생의 계획을 '강 살리기'라고 강변합니다. 명백한 '녹색세탁'입니다. 서민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데도 22조2000억 원의 국민 혈세를 쏟아붓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생명적입니다. 일시적 경기 부양으로 정권 안위만 가능하다면 못할 일이 없는 정부입니다.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지 않는 현 정부의 오만은 자연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입니다. 불살생의 계율이 개인 신행이나 도덕률의 차원에서 사회적 각성으로 확산되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불살생의 계율에 철저하다고 해도 대규모의 살생 앞에서는 사회적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서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공업 중생으로서 책임은 나눠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자들이 신앙의 차원에서 강 살리기의 모순을 직시해야 할 이유입니다. 특히 전 국토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자연에 대한 약탈 행위는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재앙입니다.
현 정부와 같은 개발지상주의자들은 불살생의 관점을 종교적 이상론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 보를 물러서서 현 정부의 국토 개발이 타당하다는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치의 오류 없이 이루어졌다 해도 땅, 물, 햇볕, 바람(대기) 같은 생명 유지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 한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현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해 일상적으로 수렵을 해야 했던 과거보다도 더 투철하게 불살생을 생태적 세계관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불살생의 정신은 위기에 처한 지구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제2의 천성이어야 합니다.
'공경'으로서 '불살생'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과학의 발달이 모든 인간에게 왕의 편리를 제공하고 의료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은 면할 수 없습니다. 생멸의 차원에서 파리나 모기,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다른 유정과 동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환하는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 자신의 다른 몸입니다. 인간이 다른 유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만물을 내 몸처럼 여길 줄 아는 각성을 할 줄 아는 존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따라서 불살생의 정신은 인간 존엄의 둥지입니다.
인간이 다시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땅과 물, 햇볕과 공기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연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입니다. 인간이 지구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자연의 생기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햇볕과 공기, 강물과 같은 자연의 바탕은 누구에게나 거저입니다. 인류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불살생의 정신은 대자연의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자 공경입니다.
현 정부의 '강 살리기'는 100%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자연에 대해 오만하다는 점에서 불순합니다. 태초부터 이 땅의 생명을 길러왔던 '땅'과 '물'의 본성을 건드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히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정도의 무모한 시도입니다. 진정 강을 살리려거든 항구적 국토 유린이 될 토목공사식 발상을 버리고 자연의 근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합니다.
불살생의 관점에서 현 정부의 개발지상주의는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반생명적입니다. 빈부 양극화의 골을 더 벌려 놓음으로써 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한국 여성의 자살률이 OECD 국가의 1위이고 한국인 전체의 자살률은 OECD 국가의 3위라는 사실은, 불살생의 관점에서 복지의 문제에 접근해 볼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 생태나 인권과 같은 보편 가치의 옹호조차도 이념 논쟁으로 왜곡합니다. 정부야말로 '개발지상주의'와 '시장 만능', '경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재앙이 되어가고 있는 새만금의 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바랍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경제 살리기니 국책 사업이니 하면서 무분별한 개발의 관성이 맹목화하기 전에 진정 열린 마음으로 산하대지와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온 생명의 안온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성찰해 보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모든 계율의 으뜸이 불살생이듯이 지구를 살리는 천 가지 만 가지 방법이 있다 해도 그 으뜸은 불살생일 것입니다. 모든 유정은 유한하지만 그것의 생존 터전인 자연은 무한합니다. 불살생의 정신은 자연과 합일할 수 있는 생명 해방의 길입니다. 해탈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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