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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모의 병환을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4일(목)부터 12일(금)까지 서울성모병원에 있었습니다. 이틀은 응급실에 있었고, 엿새 동안은 완화의학과(호스피스 병동) 병실에서 생활했습니다. 어머니의 노환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노환이 아니어서 서둘러 서울성모병원으로 모시게 되었고, 하루 24시간 줄곧 어머니의 병상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병상을 지켜 드려야 하는 사정 때문에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들을 포기하거나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6일의 오체투지 마지막 날 순례기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원래는 5일 오후 서울에 가서 합정동 아이들 자취방에서 자고, 6일 아침 일찍 신촌 역에서 열차를 타고 임진강 역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신촌 역의 위치와 임진강 역으로 가는 아침 열차 시간 등을 자세히 알아놓았습니다.

임진강 역 부근에서 시작하는 오체투지 마지막 날 순례기도에 아침부터 참여하고, 오후 2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갖는 2차 순례 회향식 행사 참석 후 서울로 돌아온 다음 저녁에는 아이들과 함께 용산미사에 참여할 계획이었습니다.

최고령 자원봉사자 2008년 4월 26일 태안군 소원면 의향리 가르미 해변에서 85세 노인네가 대학생 손녀와 함께 기름제거 작업을 했다. 어쩌면 자원봉사자 123만 명 중에서 최고령 봉사자일 수도 있을 터였다.
▲ 최고령 자원봉사자 2008년 4월 26일 태안군 소원면 의향리 가르미 해변에서 85세 노인네가 대학생 손녀와 함께 기름제거 작업을 했다. 어쩌면 자원봉사자 123만 명 중에서 최고령 봉사자일 수도 있을 터였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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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획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체투지 마지막 날 순례기도에는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서울에 있는 동안 더러 용산미사에 참여하고 싶었고, 참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두 대학생 아이들과 잠깐씩 교대를 한다든지, 궁리를 하면 더러 용산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의 병상을 지켜드리는 일에는 '집중'이 필요했습니다.

또 어머니 입원 동안의 필요 사항들 때문에 잠깐씩 두 번 태안을 다녀가야 하는 사정도 있고 해서, 서울에 몸을 놓고 있으면서도 용산미사에 참여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아쉽습니다. 그것이 내 무관심이나 태만으로 빚어진 일은 아니지만, 내가 참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을 외면한 것처럼 되어 정말 아쉽습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계속되는 데 있습니다. 노모께서 퇴원하시고 열흘이 지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난 19일(금) 서울성모병원에 혼자 가서 2주일 분의 약을 타 가지고 온 일 외로는, 그리고 오후 1시간 정도 걷기 운동을 하는 일 외로는 장시간의 외출을 삼가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도 요즘은 살림을 혼자 하는 형국이 되어 여간 바쁘지 않습니다. 퇴근 후 직원회식 같은 것에도 일절 참석치 않고 곧장 집으로 오곤 합니다. 어머니와 우리 부부만의 세 식구 살림이 아니고 4년 전 상처한 동생 가족도 함께 사는 살림이라 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따리 싸는 꿈도 꾸시는 어머니

호스피스 병동 봉사자들 서울성모병원 완화의학과 호스피스 병동의 천주교 신자 봉사자들이 내 어머니의 발을 씻겨주고 나서 발마사지를 하고 있다.
▲ 호스피스 병동 봉사자들 서울성모병원 완화의학과 호스피스 병동의 천주교 신자 봉사자들이 내 어머니의 발을 씻겨주고 나서 발마사지를 하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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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들어 어머니께 숨이 가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틀니가 온전치 않은 현상 때문에 음식을 잘 잡숫지 못해 영양 부족으로 온 증상이 아닐까 싶어 동네 의원에 모시고 가서 영양제를 놓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4일) 다시 모시고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 한쪽 폐 사진이 온전치 않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근처 방사선의원으로 모시고 가서 CT 촬영을 해보니, 오른쪽 폐 밑에 물이 차 있다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서울성모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서 다시 엑스레이와 CT 촬영을 한 결과 오른쪽 폐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 종양의 진행으로 폐 밑에 물이 찼다는 것이었지요.

밤에 응급실에서 어머니의 늑막에 고인 물을 빼내는 시술이 있었습니다. 등에 주사기를 꽂고 500cc 정도의 누런 물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엑스레이 촬영을 하니 양쪽 폐의 윤곽이 확실하게 잡히더군요.

오른쪽 폐의 종양이 폐 자체에서 생긴 원발성 종양인지, 아니면 2001년의 대장암으로부터 전이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복부도 CT 촬영을 해보았습니다. 2001년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2년 동안의 투약 관리 끝에 완치 진단을 받았지만, 그 대장암으로부터 폐와 갑상선에 암세포가 전이된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응급실 젊은 여의사의 진단이었고, 폐의 종양이 암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 종양이 진짜 암세포인지, 암세포라면 어떤 성격의 암세포인지(암세포도 종류가 많으므로)를 알려면 조직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며 응급실의 젊은 여의사는 내게 두 가지 방향 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종양내과로 입원해서 조직검사 등으로 폐종양의 정체를 확인한 다음 그것에 맞는 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완화의학과로 입원해서 증상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고통을 줄이는 가운데 여생을 마치시게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가족들과도 의논해서 결정한 다음 아침 6시까지 알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묵주를 쥔 채 혼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올해 연세 86세이신 어머니 폐종양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부터 노인께는 고문이 될 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확진이 나온다면, 그땐 어찌할 것인가? 수술을 할 터인가, 항암치료를 할 터인가? 그것들을 노인이 견디어낼 수 있으며, 또 치료를 한들 완치가 가능하겠는가? 그런 의문들 앞에서 결국 완화의학과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완화의학과의 호스피스 병동은 우리 가족 모두 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었습니다. 유난히 친절한 의사들과 간호사들, 유니폼을 입고 봉사하시는 분들의 밝고 환한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임종을 기다리시는 환자들도 있는 병실로 들어가면서 눈치 빠르신 어머니가 혹 뭔가를 직감하시고 상심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이 병실로 오셨을 뿐이고, 곧 퇴원을 하시게 된다"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곤 했습니다.

병상 곁에서 부르는 성가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 환자들에게 노래를 불러드리는 윤주향씨. 개신교 신자라는데, 천주교 성가를 잘 불렀다.
▲ 병상 곁에서 부르는 성가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와서 환자들에게 노래를 불러드리는 윤주향씨. 개신교 신자라는데, 천주교 성가를 잘 불렀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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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주일만에 일단 퇴원하셨습니다. 잡숫는 약이 꽤 많은데, 약 때문인지 잠을 많이 주무십니다. 지난 19일 서울성모병원에 가면서 약이 좀 줄기를 바랐는데, 변비 약 한가지만 줄어서 좀 서운한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약은 줄어들 것 같지 않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식사를 잘 하십니다. 잘 드시는 식사 덕에 '예상'보다 더 오래 사실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갖게 합니다. 어머니의 식사(영양 보충)를 위해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식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은 지난 주말에,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은 연이어 두 번 주말에 친정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갔습니다. 바쁘게 사는 처지에서 거듭 주말에 와서 하루씩 묵고 가는 딸들 덕에 어머니는 호강을 하시는 폭이지만 혹 그 때문에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실지도 몰라 나로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또 잠을 많이 주무시는 어머니의 꿈 내용에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보따리 싸는 꿈을 꾸었다고 하시더니, 엊그제는 어딘지 모를 곳을 가던 중 두 갈래 길 앞에서 누군지 모를 남자에게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묻다가 잠이 깼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런 어머니 오늘 점심때는 방에서 나오시면서 "애들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더니, 꿈인 것을 아시고는 "희정이 희영이(외손녀들) 가족이 모두 와 있어서 점심 차려줄 생각으로 벌떡 일어났는디"하며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딸의 친정 방문 해방동이 맏딸과 안산에서 사는 셋째 딸이 또 친정을 찾았다. 미국에서 사는 두 딸은 어머니 생전에 와볼 수 있을지 모르고...
▲ 두 딸의 친정 방문 해방동이 맏딸과 안산에서 사는 셋째 딸이 또 친정을 찾았다. 미국에서 사는 두 딸은 어머니 생전에 와볼 수 있을지 모르고...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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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비몽사몽도 많이 겪으시는 어머니는 그런 가운데서 기도도 하십니다. 쏟아지는 잠 때문에 오래 하시지는 못하지만, 촛불 켜고 십자가와 작은 성상들을 모신 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하시는데, 병중에도 기도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오히려 내게 큰 위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야만의 시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는 요즘 어머니께 때맞춰 약을 챙겨 드리고 늘 곁에 있어 드려야 하는 일로, 주로 집안에서 소일합니다. 자연 글 쓸 시간은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난분분하여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 쓸 염치가 없어서였습니다. 

내가 노모의 병환 때문에 서울성모병원과 집 안에만 있는 동안 요지경 세상의 한 곳 서울 용산에서는 연이어 야만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미사를 지내시고,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유가족들과 슬픔을 함께 하고 계시는 신부님들이 경찰들의 폭행에 수난을 당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소상히 알면서도, 신부님들과 그곳에 오시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그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면서 집안에 편안히 앉아 글만 쓴다는 게 너무 죄스럽습니다.

내가 서울 한 곳에 두 대학생 아이의 자취방을 마련할 때는 그 자취방을 최대한 이용하여 용산미사만이라도 적극적으로 참례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럴 수 없게 상황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개신교 장로 대통령의 야만적 폭거 앞에서 수난을 당하시는 신부님들 곁에 함께 하지 못함이 너무 아쉽습니다.

요즘 참으로 많은 일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분별 없고 해괴하고 음흉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몰염치, 파렴치, 후안무치, 이 '3치'가 'MB의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봉운사 주지 명진 스님의 입에서 나올 정도입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역사 발전과 사회 진보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MB의 시대정신'인 '3치'를 구성하는 그 모든 일들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이는 것일 뿐입니다.

내 비록 노모의 병환 때문에 역사의 현장인 용산에 가는 일을 요즘 쉬고 있지만, 계속 쌓여만 가는 '3치'의 세목들에 대한 올곧은 정의의 시선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용산에 오래 다시 나타나지 않는 나를 궁금해하실 분들도 계실 터이기에 소식을 전할 겸 이 글을 썼습니다.   


#용산미사 #완화의학과#MB시대정신, 3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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