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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소리대로 영어로 옮기면 'see in'이 된다. 이렇게 홈페이지 주소를 쓰는 시 전문지도 있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어설픈 음차지만 제법 절묘하다 싶다. 시인은 속, 즉 본질을 보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존재다. 그 시인 중에 최영미가 있고, 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했던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쇄신 드라이브

 

5월 초 한나라당의 일부가 입을 열었다. 쇄신을 제기한 것이다. 재·보선 패배 후라 쇄신 주장은 누가 해도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으나, 어쨌든 그들은 참 '많은 말들'을 앞세웠다. 다행히 쇄신파의 초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발산(拔山)의 힘, 개세(蓋世)의 기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당내에 쇄신특위도 만들어졌다. 여론도 호응했다.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대세가 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쇄신은 표연히 사라졌다.

 

망할 징조가 망징이고, 패할 조짐이 패조다. 쇄신 드라이브가 망징패조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쇄신이 요구된 배경은 이명박(MB) 대통령의 일방주의, 편부(偏富)정책이었다. 4․29 재·보궐 선거 직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여당의 패배 이유를 국민에게 물었다. 58.6%가 정부여당의 잘못된 국정에 대한 심판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런 여론은 한나라당의 '민본 21'이 디오피니언에 의뢰한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대통령 혹은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해 '국민의 의견과 동떨어진 일방통행식이 많다'가 77.0%, 현재 대통령 혹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 기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부자나 기득권층을 더 대변하고 있다'는 응답이 68.8%로 나왔다. 요컨대 여권이 아픈 이유, 즉 병인은 MB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단결과였다.

 

처방은 진단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한나라당 쇄신파는 진단과 사뭇 다른 처방을 내세웠다. 박희태 대표 퇴진과 조기 전대론이었다. 본말이 전도된 속에 지루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망징패조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국민들이 재빨리 낌새를 알아차렸다. 5월 25일 KSOI 조사에서 65.4%가 쇄신특위의 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단지 29%만이 기대한다고 응답했다. 역시 대중의 예지는 자못 섬뜩하다. 이 정도면 퍼뜩 정신 차리기에 충분한 경고였다.

 

그러나 쇄신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이 구체제를 깰 약한 고리로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둔감했을까. 그들은 계속 박 대표 사퇴와 조기 전대론에 매달렸다. 6월 8일, 박 대표와 원희룡 쇄신특위 위원장 간에 합의가 있었다. 화합하는 조기 전대가 이뤄진다면 박 대표가 사퇴하겠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쇄신 압박은 일제히 사라졌다. 사실상 이때 이미 쇄신작업은 망하고, 쇄신싸움은 패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능했다

 

화합형 조기 전대론은 박근혜 전 대표 합의 추대론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자 전선이 바뀌어버렸다. 쇄신파와 친박이 대립하는 구도로 변질된 것이다. MB는 쏙 빠졌다. 친박 진영이 앙앙불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후에 원 위원장이 합의를 부정했으나 이미 늦은 터였다.

 

"대통령의 변화가 쇄신의 가장 핵심이다." 그의 이 주장 또한 공허한 외침이었다. 친박 진영은 줄기차게 MB의 국정운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런데도 쇄신파는 그들을 우군으로 만들지 못했다. 보통의 상식으로 봐도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이었다. 싸움의 식견으로 보면 결정적 패착이었다. 

 

전설상의 동물이 있다. 낭(狼)과 패(狽)다. 둘 다 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다.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은 것이 낭이다.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은 것이 패다. 낭은 용맹하나 꾀가 없다. 패는 꾀가 많으나 겁이 많다. 그래서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따로 가면 넘어진다. 여기서 나온 말이 낭패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됐다.

 

정치에서 명분은 낭이다. 구도는 패다. 낭과 패가 그렇듯이, 명분과 구도는 함께 가야 한다.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쇄신 세력은 명분을 쥐고 있었다. 재보궐 선거에서 진 데다, 당 지지율도 급전직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명분을 담보할 구도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친박을 결과적으로 쇄신 반대로 몰아버렸다. 결국, 한나라당 쇄신파는 낭패를 자초한 것이다. 이런 능력으로 어떻게 이미 뿌리 내리고 있는 체제를 혁신할 수 있으랴.

 

6월초 KSOI 조사에서 한나라당 쇄신 세력은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33.5%를 기록한 친 박근혜 전 대표 세력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7.3%였다. 친 이명박 대통령 세력은 14.7%였다. 지난 1월의 조사에 비하면 쇄신세력의 이런 상승은 놀라운 것이다. 그때엔 친 박근혜 세력이 42.2%, 친 이명박 대통령 세력이 16.3%, 원희룡 등 비주류 세력이 15.4%였다. 1월의 비주류 세력과 6월의 쇄신 세력이 다르지 않다.

 

쇄신 세력에 대한 호감도가 거의 2배 가까이 상승한 것은 성패를 떠나 쇄신에 대한 필요성이 매우 절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지층을 대상으로 할 경우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친 이명박 대통령 세력이 38.1%, 친 박근혜 전대표 세력이 37.3%, 쇄신 세력이 8.0%의 호감도를 기록했다. 이것은 쇄신 세력이 그 동력을 국민들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시종일관 국민 여론을 대변하면서 쇄신(碎身)했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내 문제인 박 대표 퇴진과 조기 전대에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국민들의 동력을 끌어내는 데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시종일관 국민 여론을 대변하면서 쇄신(碎身)했더라면 기세가 그처럼 허망하게 흐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타깃을 조기 전대가 아니라 MB 변화로 삼았더라면 끝내 물꼬가 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창에 빠진 채 허공에 삿대질만 해대고 있었다. 

 

조광조는 쇄신·개혁의 우상이다. 숱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뜯어고치려다 죽음에 이른 비극을 상징한다. 허나 사실 조광조는 개혁의 본령에 이르지도 못한 채 실패했다. 인간 조광조는 염아했으나, 개혁가 조광조는 무능했다. 열정만 있을 뿐 전략적 마인드가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나라에게, 그리고 백성에게 모두 비극이었다.

 

"몸이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져 도리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징계 삼아 감히 일을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율곡의 평가다.

 

역사 속의 조광조를 사랑하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다. 수구에 찌든 후인이 가질 수 있는 인지상정이다. 개혁성공을 위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따라서 최소한 지금만큼은 쇄신 운운한 그들을 연민하는 건 사치다. 그들에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낭비다.  

 

최영미의 시에 이런 대목도 있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태그:#한나라당 , #쇄신, #여론조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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