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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 종로에는 어떤 헌책방이 있을까

서울 종로구에 헌책방에 있는 줄 아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서울 종로구에 헌책방이 꽤 많았던 줄로 알고 있으며, 또 헌책방이라기보다는 옛책방이라 할 만한 곳도 여럿 있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종로구 평동에는 〈연구서원〉이라는 옛책방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가회동 중앙고등학교 옆에는 간판은 그대로 남은 헌책방 〈합서점〉이 버티고 있습니다. 영화 〈바람난 가족〉을 보면, 주인공 남녀가 길거리에서 싸우는 대목에서 뒷모습으로 얼핏 〈합서점〉 간판이 나옵니다. 저야 그 대목에서 '주인공이 서로 싸우는 모습'보다도 '헌책방 간판이 찍혔잖아!' 하는 데에 눈길이 멎으면서 몇 초쯤 더 나오려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사이는 이곳 가회동 중앙고등학교 앞은 '배우 배용준이 찍은 〈겨울연가〉 관광명소'가 되어, 문방구마다 배용준 씨 사진을 잔뜩 걸어 놓고 있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종로구 관훈동에는 한때 〈감꽃책방〉이라는 옛책방이 터를 잡은 적이 있는데, 이곳은 책방이 깃든 건물이 재개발로 헐려야 해서 문을 닫았습니다. 광화문 역사박물관 건너편쯤이라고 했던가, 저는 가 보지 못했으나 〈공씨책방〉 공진석 님은 '서울 종로(광화문) 한복판에 새책방으로는 교보가 있으면 헌책방으로는 공씨가 있도록 하겠다'는 큰 꿈을 품고 가게를 꾸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마저 동네 재개발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셨고, 공진석 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지금과 같은 신촌 언덕배기에 자리잡습니다. 종로2가 큰길가에 아주 조그마한 헌책방이 한 곳 있었는데,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어도 발걸음을 멈추고 느긋하게 책을 들여다보던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헌책방이 문을 닫은 다음 꽃집으로 바뀌었는데, 꽃집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골목길에서 쉬 놓칠 만한 작은 간판 <대오서점>입니다.
 골목길에서 쉬 놓칠 만한 작은 간판 <대오서점>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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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천에서 살아가니 서울마실을 자주 못하지만, 서울에서 지내던 때에는 날마다 골목마실을 하면서 '아직 내가 모르는 헌책방이 더 있지 않을까' 하면서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헌책방 〈대오서점〉은 일고여덟 해쯤 앞서, '이런 깊은 골목도 다녀 보아야 헌책방이 더 있는지 없는지 알 테지' 하면서 다리품을 팔다가 뜻밖에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저로서는 뜻밖에 만난 곳인데, 헌책방으로 보자면, 예전부터 죽 그 자리에서 책장사를 하고 있었으나, 저 같은 책벌레들이 못 알아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동네사람들만 드나들거나 샛장수나 도매상에서 드나들었다고 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종로구 누하동 헌책방 〈대오서점〉 가까이에는 '환경운동연합'이라는 시민모임이 있습니다. 조금 옆으로는 배화여자대학교라는 곳이 있습니다. 몇 분 거닐면 정부종합청사가 나오고, 청와대하고도 가깝습니다. 경복궁하고 바로 맞닿아 있다고 해도 될 만한 자리이며, 사직공원하고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골목 안쪽에 깃들어 있다뿐입니다. 골목 안쪽에 깃들어 있다 보니, 자가용으로 움직이는 분들은 이 앞을 지나다닐 일이 없고, 이 앞을 지나다닐 일이 없으니 이곳에 헌책방이 있음을 알아볼 일 또한 없습니다. 걷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하여도 청와대 앞이나 삼청동이나 경복궁쯤까지 갈 뿐, 굳이 누하동 안쪽 골목까지 들어서지 않습니다. 아마, '누하동'이니 '가회동'이니 하는 동이름조차 낯설다고 느낄 분이 많지 않을까요? 관훈동과 인사동은 알아도 '평동'은 모르지 않을까요? '평창동'을 잘못 말해 '평동'이라 여기는 분이 있기도 하고, 우체국 일꾼조차 때때로 우편물을 잘못 보내기도 했습니다(제가 '평동'에서 여러 해 살면서 겪었던 일입니다).

그나마 서울 종로구 평동이라는 조그마한 동네에서 홀살이를 하던 때에는 슬금슬금 걸어서 누하동 〈대오서점〉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습니다. 딱히 살 만한 책이 없더라도, 굳이 책을 살 생각이 아니라도, 할머니를 뵈면서 인사를 나누는 일은 기쁘고 좋았습니다. 왕할머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과자꾸러미를 사들고 인사를 하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얼굴을 비추면서 인사 몇 마디씩 나누었는데, 퍽 멀리 떨어져 지내는 어머니를 생각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기도 하면서 헌책방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옅은, 또는 짙은 하늘빛으로 대문을 바른 헌책방 <대오서점>과 어깨(지붕)를 나란히 하는 가게가 여럿입니다.
 옅은, 또는 짙은 하늘빛으로 대문을 바른 헌책방 <대오서점>과 어깨(지붕)를 나란히 하는 가게가 여럿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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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곰곰이 짚어 보는 책

따로 책을 사겠다는 마음이라기보다, 가볍게 들러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마음이기에, 할머니 말씀마따나 '새로 들여오는 책이 없어 볼 만한 게 없을'지라도 괜찮습니다. 볼 만한 책이란 나 스스로 알아차리며 받아들이는 책이지, 누군가 쥐어 주거나 선사해 줄 수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쓸모가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때와 곳에 따라 쓸모가 달라지는 책이기도 하고요.

이리하여, 《어린이 정서 교육, 366일 이야기 (2) 2월의 이야기》(국민서관,1982)를 보면서 흐뭇합니다. 한 해 열두 달에 맞게 열두 권으로 된 책이었을까 싶은데, 판권을 살피니 책은 열세 권이도 테이프는 스물넉 장이 한 묶음으로 된 판이었다고 합니다. 날짜에 맞추어 하루에 한 가지 이야기씩 아이한테 들려주도록 짜 놓았는데, 열세 번째 책은 어버이가 먼저 읽으며 생각하는 도움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물 몇 해나 묵은 낡은 어린이책이라 오늘날에는 걸맞지 않을 수 있는데, 걸맞든 안 걸맞든, 지난날 어린이책 흐름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마음밥을 먹이려 했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 언제나 웃는 얼굴 방글방글 / 언제나 착한 마음 방글방글 / 성내지 않는다, 하하하 / 싸우지 않는다, 하하하 / 언제나 환한 얼굴 방글방글 / 언제나 밝은 마음 방글방글 / 공부도 즐겁게 하하하 / 놀기도 정답게 하하하 ..  (2월 10일,어효선/26∼27쪽)

기와집 시렁에는 책이 놓여 있어 책시렁입니다.
 기와집 시렁에는 책이 놓여 있어 책시렁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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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 옛이야기와 동시를 짤막하게 담아내고 있는 글하고 그림을 넘겨 보는데, "언제나 웃는 얼굴 방글방글"이라는 시를 읽다가 흠칫 놀랍니다. 참말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싸우지 말고 착하고 환하게 웃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삐죽삐죽거리면 싫어하고, 아이가 낯을 찌푸리면 나무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어른들은 늘 찌푸린 얼굴에다가 성난 낯으로 돌아다닙니다. 아이들 앞에서 거친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뇌까리며, 이웃사랑 동무사랑은 거의 펼치지 않아요.

모르기는 몰라도, 1982년뿐 아니라 2002년에도 매한가지인 우리들이 아니었으랴 싶고, 2012년이나 2022년이 되어도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만 '착한 사람 되기'를 바라고, 우리 어른 스스로는 '착한 사람 되도록 애쓰기'는 안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만화책 《Ashibe Ywooho/편집부 옮김-크리스탈☆드래곤 (1)》(영상문화사,1994)와 《다카하시 류미코/편집부 옮김-1파운드의 복음 (2)》(제삼아트,1995)을 봅니다. 두 가지 모두 해적판입니다. 옮긴이 이름이 없을 뿐더러, 출판사 이름을 보건대 이웃나라 몰래 슬쩍 펴낸 녀석들입니다. 《크리스탈☆드래곤》은 순정역사만화이고, 《1파운드의 복음》은'권투선수와 수녀' 이야기를 담은 다카하시 류미코 님 오래된 작품입니다. 판권을 살피니, 다카하시 류미코 님 다른 작품인 《비밀은 없어!》도 내놓았다고 하는데, 해적판 만화책으로 이 판을 헌책방에서 짝맞추기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적판 아닌 만화책을 판끊어진 가운데 헌책방에서 만나기도 어려운 노릇이지만, 판끊어진 해적판은 더더욱 만나기 어려우니, 그저 이렇게 오늘 구경해 본 일로도 고맙게 여겨야 할까 싶습니다.

.. '저는 박동철 씨를 응원하겠습니다. 저는 틀렸을까요. 주여, 대답을!' ..  (220쪽)

《1파운드의 복음》은 이름으로만 듣던 작품이기에, 짝을 잃은 하나만 달랑, 더구나 해적판으로 들어와 있어도 반갑습니다. 다카하시 류미코 님은 첫무렵 작품이나 요즈음 작품이나 만화 그리는 매무새나 느낌이나 그림결이 거의 한결같구나 싶은데, 만화에 담는 생각힘이 퍽 남다릅니다.

《Queen 스페셜 별책부록 : 알뜰시장 가이드》(?)가 보이기에 집어들어 봅니다. 책겉에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6대 도시" 시장을 알려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면 '인천에 있는 알뜰시장'은 오직 소래포구 한 군데 이야기만 담아 놓습니다. 더구나,

섬돌이 있고, 꽃그릇이 있고, 책이 있습니다.
 섬돌이 있고, 꽃그릇이 있고, 책이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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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봄철에 구입해 여름 내내 삭혀 만든 새우젓은 육젓이라 해서 최상품으로 꼽힌다. 또 소래포구 안쪽에는 40여 개의 젓갈가게들이 있어 조개젓, 명란젓, 오징어젓 등 각종 젓갈들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 도로사정과 주차시설이 부족하여 주말에는 교통체증을 겪기도 한다 ..  (128쪽)

고작 이렇게만 몇 줄로 달아 놓습니다. 옷이든 그릇이든 무엇이든, 인천에도 오래된 전통시장이 꽤 많은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실어 놓지 않습니다. 인천이 잘난 곳은 아니나 못난 곳도 아니요, 그저 '사람 사는 곳' 가운데 하나인 한편, 옛날부터 '서울로 물건이 들어가도록 하는 나들목' 노릇을 하면서 여러모로 저잣거리가 꽤 크게 이루어져 있곤 했습니다. 트집을 잡으려는 소리가 아니라, 잡지 별책부록으로 "서울,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6대 도시"라고 이름을 붙이려 했다면, 여섯 곳 큰도시 알뜰시장을 골고루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 잡지를 받아보는 '인천에서 사는 독자'를 얕보아도 너무 얕본 노릇입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책을 파는 알뜰시장' 이야기는 한 줄조차 들어가지 않습니다. 서울 청계천이라든지 부산 보수동이라든지 광주 계림동이라든지 인천 배다리라든지 하는 헌책방골목은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먼지를 많이 먹고 있던 동화책 《이준연-도깨비가 된 허수아비》(햇빛출판사,1985)와 《이준연-도깨비 방망이》(햇빛출판사,1985)를 고릅니다. 두 가지 책 모두 도깨비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도깨비를 다루어야만 꼭 우리 옛 문화를 이야기한달 수 없으나, 또 세월에 따라 우리가 즐거이 나눌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퍽 업신여기면서 금세 내치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서 재미난 이야기 엮어내는 데에는 마음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고 느낍니다.

..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산업 사회가 되면서부터,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따뜻한 사랑방 아랫목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우리들의 주위에서 사라져 갔읍니다. 그리고 질화로 속에 묻은 군밤을 까먹으면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옛날이야기를 듣던 어린이들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읍니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우리 조상님들의 얼과 문화와 풍습과 삶이 깃들어 있는 전래동화를 듣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머리말)

기와집에 깃든 헌책방다운 예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이곳입니다.
 기와집에 깃든 헌책방다운 예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이곳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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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포토스타》(홍진문화사) 50호(1994.4.)는 연예인 뒷이야기를 싣는 잡지인 듯한데, '화보'라는 이름으로 실은 '여배우 헤엄옷 차림' 사진은 거의 모두 일본잡지에서 오려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울올림픽, 제24회 서울올림픽 공식안내》(오리콤,1988)라는 이름이 붙은 사진책을 봅니다. 제법 품을 들여 엮었다고 느끼는 가운데, 품은 품대로 많이 들이기는 했을 테지만, 빛과 그늘이라는 테두리에서 바라본다면 외곬 목소리만 담은 책자입니다. 서울올림픽을 정치권력 휘두르는 데에 부려쓴다든지,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아시아경기를 치르며 제 삶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아픔이라든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습니다. 빛을 이야기하며 꼭 그늘을 이야기하란 법은 없으나, 온나라에서 '억지스런 철거' 때문에 빚어지는 아픔이 그치지 않고 나타나는 모습을 본다면, 이와 같은 뿌리는 서울올림픽에도 가 닿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에도 가 닿고 있고, 제주섬 개발에도 가 닿고 있는 한편, 새만금만이 아닌 모든 갯벌 메우기에도 가 닿고 있습니다.

그나마 서울올림픽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라면 그때 앞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테지만, 서울올림픽 뒤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빛만 보여주는 글과 그림과 사진'에 묻혀 온 모습을 고루 바라보는 매무새를 기르기 어렵습니다. 이는, 1980년 광주 이야기에서도 매한가지요, 1970년대 유신독재에서도 매한가지이며, 1960년 학생혁명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전쟁과 해방과 일제식민지라는 테두리, 또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전쟁이라는 테두리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역사에 남는 이야기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역사에 새기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평택 대추리 이야기는 누가 쓰지요? 거창 양민 학살 이야기는 누가 썼지요? 보도연맹 사건을 몸소 겪은 사람은 얼마나 남아 있지요? 창씨개명과 정신대ㆍ징병ㆍ징용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만큼 있는지요?

그런데, 이런 머나먼(따지고 보면 그리 멀지도 않으나) 이야기만 제대로 알기 어려운 우리들이 아닙니다. 온통 도시로만 몰려 지내면서, 농사짓기조차 모릅니다. 실을 자아 천을 짜고 옷을 깁는 흐름조차 모릅니다. 오이를 먹으면서 오이꽃을 생각해 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감을 먹으면서 감꽃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만 배불리 먹겠다고 치는 농약이요 비료요 항생제인데, 이런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가 사람한테 끔찍한 노릇임이 알려져도 이런 화학약품 쓰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달리는 자동차가 멈추지 않고, 끝없는 재개발과 새로운 고속도로 닦기가 멈추지 않듯, 우리는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버리는 길로 빠져들고만 있습니다.

헌책방과 이웃한 옷수선집 앞에도 꽃그릇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곳도 골목길이거든요.
 헌책방과 이웃한 옷수선집 앞에도 꽃그릇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곳도 골목길이거든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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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곁방에 들어온 할머니

헌책방 〈대오서점〉 나들이를 하고 나서 꼭 한 해가 조금 더 지난 2009년 5월 마지막날 다시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께에는 광복절날 찾아가지 않았나 싶은데, 찾아가는 날마다 용케 날이 맑고 따뜻합니다. 다음해에도 날 따숩고 맑은 날 찾아뵈며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궁금한데, 이참에 찾아가 보니 〈대오〉 할머니는 안 계시고, 곁방에 삯 내고 들어온 할머니만 계십니다. 〈대오〉 할머니가 바깥일을 보려고 곁방을 삯으로 내어주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아침 일찍 찾아가거나 저녁나절 찾아가지 않으면 헌책방 〈대오〉 할머니를 뵐 수 없다고 합니다.

기와를 얹은 옛집에 마련된 헌책방 〈대오서점〉은 살림집하고 헌책방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툇마루가 있고 책시렁이 있습니다. 섬돌이 있고 마루가 있습니다. 곁방은 비어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올 만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할머니밖에는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원룸에는 들어가더라도 한옥집 곁방을 얻어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손바닥 만한 마당을 함께 쓰고, 마당에 붙은 뒷간을 함께 쓰는 한옥집 곁방살이는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책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조촐하게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서 꾸벅 인사를 드린 다음 돌아섭니다. 대문은 옅은 하늘빛으로 바른 그대로이고, 손글씨 간판도 그대로입니다. 헌책방이 깃든 골목길 호젓함 또한 그대로이며, 따사로운 햇살은 헌책방집 기와에도 빌라 옥상에도 골고루 내리쬡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헌책방 간판을 지키기란 만만하지 않은 일'이겠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날 흐름에서는 '헌책방 찾아다니는 손님으로 남는 일' 또한 만만하지 않은 일이라고 느낍니다.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도 인터넷으로만 들어가는 판이기에, 두 손으로 책을 만지고 두 눈으로 책장을 넘겨다보면서 '이 책을 살까 저 책을 고를까' 하고 느낄 수 있는 자리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듭니다.

큰길가에 자리한 헌책방과 새책방도 사라지고, 골목길에 깃든 헌책방과 새책방도 사라집니다. 기와집 한켠을 턴 구멍가게며 문방구며 비디오집이며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기와집에 딸린 헌책방 또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기는. 문화재로 뽑히지 않는 기와집이란 얼른 없애버릴 흉물처럼 여기는 흐름이잖아요. 인간문화재가 되지 않고서는 '책을 아무리 오래 만지고 잘 안다' 하여도 문화인물로 모시지 않는 우리들이잖아요. 전철을 타니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나옵니다.

책시렁과 함께 빨래줄이 걸리고, 집살림과 함께 책살림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책시렁과 함께 빨래줄이 걸리고, 집살림과 함께 책살림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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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헌책방, #대오서점, #책읽기, #책,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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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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