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만 내가 안심이 된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쓰다가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아직도 안심이 되지 않는 저의 인격적 결함이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의 글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다시 쓰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만 제 자신이 안심이 됩니다. 동료교사들을 비롯한 일반 성인들과의 만남에서는 저의 단점이나 미숙함이 자주 노출되곤 합니다. 하루 일과를 끝낼 때마다 일을 저지른 기분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아이들과의 만남에서는 오류의 빈도수가 훨씬 낮은 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방보다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성인이 아닌 세속의 사람으로서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정한 헌신처럼 보이는 행동도 결국을 나를 위한 행동일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그런 자신의 오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런 저의 인간적 미숙함이 아이들과의 만남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제 자신보다는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듯이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만약 의사가 병원을 찾아온 환자에게 집중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면 환자의 처지에서는 그런 부당하고 억울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졸업한 아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지지난 토요일, 방천길을 걷다가 우연히 이태 전에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서로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다가 근처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 세 명의 아이들을 담임 맡은 것은 3년 전의 일입니다. 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아이들과의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너무도 철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 아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와 예의를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록 저는 제 자신보다는 아이들에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천변에서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얘기를 듣다보니 저도 참 어지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인내와 사랑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 대화 속 주인공이 제 자신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가 앞서 말씀드린대로 인간적인 결함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화 도중에 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무슨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니?"

"…사랑?" 

그 아이가 정답을 확인하고 싶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제게 말했습니다. 

"사랑? 그래 너희들 많이 사랑했지. 그거 말고."

"…자유?"


저는 또 한 아이의 입에서 발음된 '자유'라는 단어에 내심 안심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법 정신적으로 성숙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펄펄 살아 날 뛰던 아이들에게 자유를 말하는 것은 숫제 섶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습니다. 저는 3일 째 무단결석을 한 뒤에 학교에 나온 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난 너에게 결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것은 결석을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결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결석을 하지 않을 생각을 하지 말고 대신 학교생활을 충실히 할 생각을 해봐.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결석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난 네가 결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기뻐하지 않을 거야. 네가 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정말 뭔가를 하고 싶어서 한다면 난 그때 기뻐할 거야. 그게 바로 자유야."

 

그날 저는 아이들과 헤어져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차피 산책길에 만난 것이어서 걸어서 돌아갈 생각을 한 것인데 아이들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하자 한 아이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저에게 전화를 하더니 잠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를 누르시면 되요. 그럼 최근에 통화한 사람과 연결이 되요. 제가 방금 선생님께 전화를 했으니까 제가 받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아마도 제가 좀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남자도 아닌 여자애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 한 편으로는 우습기도 했지만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집에 도착할 무렵 한 아이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희들 포기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넘넘 사랑해요~"


태그:#아이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