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타이어 바리케이드, 나뒹구는 쇠파이프, 도로에 흥건한 기름, 누군가 채 다 먹지 못하고 남겨 썩어가는 김밥,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리조각과 '무기'로 사용된 볼트.
평택 쌍용자동차 사업장은 '1박 2일 전쟁'이 남긴 상처로 가득하다. 쌍용자동차 사측이 고용한 용역직원 3000여 명과 공장 점거 농성 중인 노조원 1000여 명은 지난 26일부터 27일 밤까지 전쟁과 다름없는 싸움을 벌였다.
땅에서는 서로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소화기를 분사했다. 하늘에서는 화염병과 새총으로 쏜 볼트, 그리고 돌멩이가 날아다녔다. 한 마디로 유혈충돌이고, 기억을 돌리자면 용산참사 직전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불타는 바리케이트, 나뒹구는 쇠파이프... 상처 남은 쌍용자동차
사측은 27일 밤 10시께 공장에서 철수했다. 물론 그냥 간 건 아니다. 뼈 있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더 이상 평택 공장 진입을 시도하지 않겠다. 파업이 지속되면 파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직원 4000여 명은 일자리를 잃는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는 사측의 말에 '임전무퇴 결사항전' 천명으로 화답했다. 한상균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29일 오전 평택 공장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화 준비는 늘 돼 있지만, 공장 점거농성을 풀 수는 없다"며 "이제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자하는 등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사측은 스스로 직접 다시 오는 일은 없다고 했다. 노조는 대화는 하겠지만 점거농성을 풀 수 없다고 했다. 이대로 간다면 예측 가능한 길은 두 가지다. 공권력이 나서 다시 한 번 전쟁을 치르느냐, 아니면 파산으로 가느냐. 방향은 다르지만 두 길은 결국 '파국'이라는 지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우선 '1차 전쟁' 방어에 성공한 쌍용차 노조는 지금 공권력 투입에 대비하고 있다. 노조는 사측의 공장 진입 시도를 공권력 투입을 위한 하나의 '액션'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금속노조는 연대투쟁 차원에서 29일 4시간 부분 파업을 결의했고, 내달 1일에는 전면 파업을 선언했다.
쌍용차 노조는 "공권력이 다른 단체와의 연대를 막기 위해 곧 움직일 수 있다"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어 노조는 "쌍용차에 필요한 것은 공적자금이지 공권력이 아니다"며 "공권력이 무리하게 진압을 시도하면 용산참사보다 훨씬 큰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노조 공장 점거 계속..."공권력 투입은 '제2의 용산참사'"
실제로 노조는 각종 인화물질이 쌓여있는 도장공장 등을 점거 하고 있으며, 공권력 투입시 이곳을 마지막 거점으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즉 '제2의 용산참사'는 괜한 말이 아니다. 정부 역시 이런 위험 요소 때문에 쉽게 공권력 투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파산이라는 시나리오도 점점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유일, 박영태 쌍용자동차 법정관리인은 27일 공장을 떠나며 "노조가 회사의 최종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장 점거 파업을 계속하면 파산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회사가 26일 제시한 최종안은 정리해고자 976명 가운데 ▲200명 범위 무급휴직 및 해고후 재고용 ▲450여 명 희망퇴직 ▲320여 명은 분사 및 영업직 전환 등이 골자다. 노조는 이 최종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측의 파산 언급은 해고자를 설득하고 비해고자를 자극하는 '정치적 발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씩 파산 시나리오는 현실화된다는 게 쌍용자동차 안팎의 이야기다.
쌍용차 노조도 오래전부터 "정부가 노조 죽이기를 하고, 노동유연화를 최대한 관철시키 위해 쌍용차를 시범사례로 삼는 것 아니냐"며 파산 시나리오를 의심해 왔다. 이런 와중에 노조는 사측의 문건을 입수했고, 그곳에는 '파산 시나리오 작성' '파산 시점이 언제냐'라는 문구가 적시돼 있다.
노조는 "사측이 실제로 파산 시점을 판단하면서 여러 상황을 점검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물론 노조는 "파산 자체보다는 시나리오를 작성해 노조를 압박하고 '산 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사측 파산 시나리오 작성 의혹..."정부가 나서야 사태 해결"어쨌든 사측과 노조 모두에게 '파산'은 조금씩 뜨거운 화두가 돼 가고 있다.
물론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사측은 "최종안을 거부하면 파산"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노조는 '제3자 개입'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제3자'는 정부를 말한다.
노조는 29일 기자회견에서 "과거에도 결정권이 없었고 지금은 더욱더 무능함이 드러난 관리인들이 아닌 정부가 나서서 회생을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며 "정리해고 철회, 상하이자본의 주식소각, 공적자금 투입을 위한 정부의 즉각적 조치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쌍용자동차 대립현장에서 정부는 보이지 않거나, 사측의 편을 들고 있다.
경찰은 27일 쌍용자동차 충돌현장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용역직원들을 그대로 두고 봤다. 하지만 회사 앞에 모인 민주노총 조합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그리고 쌍용차 노조원 등 총 23명을 연행해 갔다.
'제2의 용산참사'와 파산이라는 상상은 조금씩 현실성을 얻어 가는데, 정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파업 40일이 다 돼 가도록 쌍용자동차 사태 해결의 실마리 역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