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진부해 보이죠. 작업도, 사진도... 그만큼 더 어렵고, 힘들지만 그 자체가 매력이죠."
또렷한 목소리로 들렸다. 구릿빛 얼굴 표정도 여전히 밝다. 사진작가 박준(54)씨. '사진예술'에 별다른 지식이 없는 기자의 눈 앞에 수십여 점의 흑백 사진들이 펼쳐졌다. 가끔 사진에 대한 그의 짧은 설명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아주 가끔' 이었다. 미국 서부의 사막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풍경 사진엔 따로 '제목'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는 것이다.
'컬러'와 '디지털'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흑백'과 '아날로그'적 감성의 사진과 작업만을 고집하는 박준씨를 지난달 26일 만났다. 30여 년만에 처음으로 국내에서 갖는 개인 전시회를 위해 얼마 전에 귀국했다.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 카페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탄탄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 듬성듬성 흰머리가 끼어 있는 긴머리를 뒤로 묶고, 회색 피켓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의 평범한 차림이었던 그는, 아직 머쓱해 하는 기자에게 "제가 이렇게 보여도, 나이가 좀 많아요"라며 분위기를 이끌기도 했다.
물론이다. 겉모습만 보면 그의 생물학적 나이를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또 그에게 그런 나이는 크게 중요치 않은 듯했다. 언뜻 그의 손을 봤다. 그는 숨김없이 곧장 내밀었다. 양손의 상당수 손가락의 손톱이 몇 번씩 빠진 듯했다. 성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47년된 수동카메라 한 대로 12년째 미국 사막만 찍는 사람- 흑백사진을 일일히 손으로 현상 작업을 하시니까."(웃으면서) 네. 아무래도 찍어온 필름의 색감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선 현상 과정이 중요하고, 또 화학약품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아니 당연하다는 표현이 낫다. 사진에 대해선 그의 철학은 분명하다. "사진은 단지 찍는 것만이 아닌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진을 찍고, 만드는 작업"은 기자같은 범상한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 넘는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심지어 렌즈가 사람의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해, 알아서 다양한 색감으로 알아서 '척척' 찍어주는 디지털 시대. 어쩌면 그는 정반대에 서 있다. 47년된 수동카메라 한 대와 일반 렌즈 3개가 12년 넘도록 그와 함께 하고 있다.
- 수동식 필름카메라에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고개를 흔들며) 뭐, 거창한 이유나 그런 것은...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접했을때의 느낌과 흑과 백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색감에 대한 매력 등..."
그는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진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장 진부한 듯한 작업이지만, 그같은 작업들이 박씨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상상 이상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의 말이다.
"(사진 작업이든) 쉽게 할 수 있죠. 그걸 뭐라 탓할 수도 없죠. 그냥 쉬운 길보다는 좀더 힘들지만,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싶은 거죠. 사막 작업이나 현상까지 하나하나가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으로 스스로를 단련시킨다고 해야 하나요?"
"가장 진부한 작업이 가장 힘들어"이어 이번 개인 전시회에 내놓을 몇 개의 작품을 내보였다. 거의 대부분이 사막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었다. 몇몇 작품은 '어부(fisherman)' 이름의 박씨가 살고 있는 지역 주민의 평범한 모습을 담은 것들도 눈에 띄었다. 그의 홈페이지(
www.parkjoon.com) 에서도 이같은 그림을 찾아 볼수 있다. 물론 모든 작품이 올라와 있지는 않지만...
왜 사막일까? 그 많은 자연 풍경을 두고 말이다. 박씨는 자신의 흑백풍경 사진에 매달리게 했던 정신적 스승인 안셀 애덤스(Ansel adams)의 말을 꺼냈다. 미국인인 안셀 애덤스는 당대 최고의 흑백 풍경사진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고, 그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죠. 물론 애덤스 작품에도 사막이 있죠. 하지만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거예요. 그에게 없던 풍경을 살리고, 기록하고 싶었던 거죠."- 맨 처음 서부 사막을 갔을 때 어땠나요."(머쓱해 하며) 지난 97년 봄 정도 였을 거예요. 정말 아무런 계획이나 정보없이 그냥 사막으로 떠났죠. 가는 길에 와이프에게 엽서 하나 띄우면서, '나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라면서요...그리곤, (사막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카메라) 렌즈 자체를 갖다 대기가 어려웠죠."
이후 네번째 사막을 접했을 때부터 카메라 렌즈를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곤 12년이 넘도록 미국 동부 끝에서 서부까지 며칠밤을 새워가며 달려갔다. 그리곤 그의 렌즈에 사막을 기록했다.
노동일하며 돈 모아 사막으로 달려가고, 돌아와서 다시 가고...'힘들지 않냐'는 다소 뻔한 질문에도, 박씨는 "어떤 때는 낮 온도가 섭씨 50도까지 오르기도 하고, 험한 지형과 갑작스런 모래 사막 등에 힘들긴 하다"면서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생활에 중독돼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사막에서의 긴 여정으로 돈이 떨어지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따로 정기적으로 돈 버는 일을 갖고 있지도 않다. 박씨는 "사진이나 전시회 등과 관련한 부정기적인 일이 있거나, 아니면 그냥 노동을 해서 돈을 모으고, (돈이) 어느 정도 모아지면, 사막으로 다시 간다"고 했다.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면서도, 시민권을 따로 갖지도 않았다. 영주권은 아니더라도, 시민권을 얻게 되면 교육이나 복지 등에서 받는 혜택을 모르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여권'을 품고 다닌다. 기자에게도 선뜻 여권을 내밀어 보인다.
"왠지 그런 것 같아요. 미국 시민권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뉴욕타임스>는 지난 2005년 2월에 박씨의 이같은 삶의 모습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문화면에 큼지막하게 싣기도 했다. 전세계 내로라는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하루에도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가 사라지는 이곳에서, 꾸준한 '박준'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에 대해 <뉴욕타임스>도 비로소 주목한 것이다.
박준씨는 지난 1일부터 오는 6일까지 대구의 대백갤러리에서 국내에선 처음으로 개인 전시회를 갖는다. 'Eternal America West(영원의 미국 서부)'이란 제목으로 올려진 작품들은 그의 '사막'이라는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같은 주제로 오는 8월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청담동 '순수' 갤러리에서도 박준씨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도 계속 (사막으로) 가야죠. 이번에 처음으로 어렵게 고국에서 개인전을 갖게 되면서, 감히 '영원'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도 순수나 진리 등에 가장 가깝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자연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가 지루하고, 진부한 풍경이란 소재를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기도 하구요..."'앞으로도 계속 사막을 갈 것이냐'는 물음에, 그가 천천히 사진들을 캔버스에 주워담으며 이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