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이류면 만정리에 있는 정봉기 아틀리에
정봉기의 아틀리에는 충주시 이류면 만정리 606-10번지에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 나들목을 나와 충주방향으로 가다 첫 번째 신호등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이 길은 대영 CC으로 이어지는데, 가마소(부연) 가기 직전 길 왼쪽으로 정봉기 아틀리에 간판이 보인다. 아틀리에로 올라가는 길 좌우에는 그의 작품이 몇 개 세워져 있다. 인체와 꽃을 오브제로 하는 조소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봉기의 예술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경사를 따라 세 채의 집이 있다. 가장 아래 왼쪽에는 작업장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재료와 그라인더, 연장 등이 바닥과 벽에 널려 있다. 한쪽 공간에서는 조각을 배우는 사람들이 정봉기와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흙으로 만든 테라코타도 보인다. 조각의 기본이 테라코타이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대상물을 흙으로 빚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모자를 쓴 채로 돌을 매만지는 정봉기와 인사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몇 가지 작업을 지시하고는 인터뷰를 위해 조금 더 위쪽에 있는 아틀리에로 자리를 옮긴다.
아틀리에는 일종의 전시실이다. 그가 만든 작품들이 아틀리에에 비교적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가운데 책상을 몇 개 놓아 응접세트 겸 자료대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한 시간 반 동안 예술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부인이 차와 떡을 내놓는다. 대화를 나누며 느낀 정봉기는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안티적인 요소도 보인다. 그는 "예술이란 진실 또는 진리를 찾아가려고 과정이다"라고 정의한다.
정봉기의 초창기 예술 이력 정봉기는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학원을 운영하며 조각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만 단체전 등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정도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정봉기는 대학원을 졸업한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예술가로 활동한다. 이때 작품이 2002년 9월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Gallery Chang에서 전시되었다. 그때만 해도 정봉기는 전통을 출발점으로 했다.
당시의 도록을 보니 먼저 12지신상이 떠오른다. 12지신상으로 대변되는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술적인 용어를 쓰면 전통의 그로테스크화이다. 당시 작품을 본 한국불교문화원장 김구산씨는 "우리의 전통적 양식을 통해 내면적 가치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는 어느 정도 이념적 지향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때의 대표작이 여인, 소녀, 기녀, 무녀와 선지자이다.
이때만 해도 사람의 얼굴이 역삼각형이다. 턱은 뾰족하고 대부분 들려 있다. 사람의 얼굴에서 쥐의 형상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얼굴이 조금은 그로테스크하다. 여인이고 소녀고 기녀고 무녀고 모두 부드럽지가 않다. 요즘말로 까칠한 기운이 느껴진다. 선지자 역시 대중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와 덕이 부족해 보인다. 이념성이 예술성을 능가하는 작품들이다. 이들은 정열과 의욕이 넘치는 정봉기의 초창기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이들은 대리석, 맥반석, 오석, 옥돌 그리고 자연석으로 만들어졌다. 돌 중에서는 대리석이 강도가 낮아 작업하기 쉽고 화강석이 강도가 높아 작업하기 어렵다. 맥반석은 그 중간쯤 된다. 정봉기는 처음 이들 돌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썼으나 이탈리아의 까라라로 유학을 떠난 2003년 이후 대리석에 매료된다. 왜냐하면 까라라가 이탈리아 대리석의 주산지이기 때문이다.
까라라(Carrara)에서 대리석에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간...
2003년 7월 정봉기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제2의 미술 인생을 시작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하고 싶은 예술행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특히 소원이던 대리석을 언제나 접할 수 있으니. 그리고 돌을 많이 보면서 돌의 연륜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돌에서 역사를 느낄 수 있었고 진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예술은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봉기는 대리석에 예술혼을 불어넣어 인간의 이상을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인간의 예술적인 능력을 고차원까지 끌어올리는 노력도 좋지만 돌 속에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 보여주는 일이 더 중요했다. 진리는 삼라만상에 늘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그의 관심사인 인물이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1년쯤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예술의식도 긍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여유와 풍요 그리고 연륜을 발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작가 정봉기 예술의 제2기가 시작된다.
2006년까지 그는 인체에 몰두한다. 특히 여체에.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머리모양이나 얼굴 표정, 입고 있는 옷 등이 부드러워진다. 그것은 정봉기가 찾은 예술적인 유머, 기교 등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또한 그가 찾은 정서적인 안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이 점점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꽃이었습니다. You were a flower/ Tu sei fiore
정봉기의 꽃 연작은 2006년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2006년까지 그는 여인 등 인체에 집착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인체에 꽃을 접목시키기 시작했고 차츰 꽃 연작으로 넘어간다. 인체를 상징하는 둥근 형태에 사지를 달고 거기에 꽃을 붙이는 방식이다. 꽃 연작을 또 둥근 형태의 대지에서 솟아나는 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인체와 꽃 두 가지로 확장된다.
그는 꽃 연작을 발표하면서 작품의 제목을 '꽃', '당신은 꽃이었습니다', '당신의 꽃' 등으로 붙였다. 그것은 꽃이 대상이라는 얘기다. 그는 대상을 불러내서 하나의 꽃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대상 속에서 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2009년 여름 OS Gallery에서 만난 여체와 꽃
정봉기 초대전이 7월2일부터 30일까지 충주 OS Gallery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지난 1년간 작업한 2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 중 2/3는 여체를 보여주고 1/3은 꽃을 보여준다. 제목도 여인, 포옹, 사랑, 봄, 여름, 가을로 다양하다. 포옹은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자식사랑인데, 남녀 간의 포옹을 보여주는 작품도 하나 있다. 제목도 '내 남자 내 여자'이다.
작가 정봉기는 또한 작품의 제목으로 계절을 좋아한다. 여체를 표현하면서 봄, 여름, 가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봄에서는 수줍음, 여름에서는 드러남, 가을에서는 사색이 두드러진다. 작가에게 겨울은 왜 없느냐고 묻자, "겨울은 기다리고 있다"고 바로 대답한다. 그가 늘 말하는 것처럼, 겨울은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정봉기는 또 다른 주제인 꽃에서 생명의 신비를 표현했다고 말한다. 꽃은 인체보다도 작업의 세밀성을 요구한다. 대리석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꽃 연작 중에서는 '성삼의 화'가 인상적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삼왕(동방박사 3인)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성삼왕을 꽃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백남준의 초창기 비디오 아트 '성삼왕'이 생각난다.
정봉기는 대개 다섯 단계의 작업과정을 거쳐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한다. 첫째가 돌 고르기이다. 두 번째가 작품의 구상이다. 이 두 과정은 바뀔 수도 있다. 세 번째가 그라인딩 과정이다. 이것은 전기톱과 망치로 이루어진다. 네 번째가 사포로 갈고 닦는 과정이다. 다섯 번째가 색깔도 내고 광도 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100% 만족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조각가 정봉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대상 속에 있는 진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예술가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정봉기의 예술은 시적이다.
나를 위한 시 이재호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은언제나 내 가슴 속에 있는 것처럼진실의 참 모습은 언제나 눈 감았을 때만 보인다.나는 이 진실을 꺼내어그대에게 기어이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