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파했다. 나는 청소당번이었으므로 유리창을 닦기 위해 창틀에 앉았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도 늘 그들처럼 그런 모양을 했을 터인데도, 창틀에 올라앉아 하굣길의 동무들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보자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그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여자 아이들은 학년의 위아래 구분 없이 책보를 다소곳이 한손으로 들고 가는 데 비하여 남자아이들의 모습은 한결같지 않았다.
책이나 공책의 권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 저학년의 경우, 보자기를 펴고 책무더기를 그 한 쪽 귀퉁이에 올려놓은 다음, 대각으로 뚜르르 말아서 양쪽 끝을 잡아 올려 허리에 두르고 질끈 동여매면 집으로의 행차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런데 오륙학년이 되면 책무더기의 부피가 제법 커지게 되므로 그것을 한 몸인 듯 허리에 차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책무더기를 책보의 한가운데에 올려놓고서 대각의 두 귀퉁이를 모아서 질끈 묶고, 다른 두 귀퉁이는 끝부분만을 묶어 멜빵을 만든 다음 어깨에 걸쳐 메고 집으로 향했다.
책보를 허리에 두른 축이 촐랑촐랑 까불까불 하며 운동장을 뛰어 나가는 모습이라면, 그것을 어깨에 멘 고학년 학생들은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가는 양 걸음걸이가 제법 의젓하였다.
학교가 파했다고 모두가 집을 향해 줄행랑을 놓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재밤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서 꾸죽배꼽(나는 '꾸죽'을 저 윗녘 사람들이 '소라' 혹은 '뿔소라'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소라가 제 알몸을 껍데기 속에 요리조리 틀어넣어 감추고서 입구를 탁 닫아서 차단하는, 동그란 맨홀뚜껑 같은 것이 바로 꾸죽배꼽이다)을 가지고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고, 매듭이 너덜너덜한 고무줄을 뻗대놓고 고무줄놀이에 여념 없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처절하고 살벌하고 비정한 전장을 읊은 노래인데도, 그 섬마을의 여자아이들은 마치 '산토끼'나 '송아지' 같은 동요를 부르듯이 깔깔대면서 잔망스런 발놀림으로 고무줄을 감고 풀고 넘고 하였다. 노랫말에 깃든 비극을 알 턱이 없는 그들에게 다만 필요했던 것은 고무줄놀이에 장단을 맞춰 줄 4분의4박자의 '아무 노래나'였을 것이다. 거기 비하면 노래 가사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젓가락 장단에 희희낙락거리며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 젖히는 어른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이상스럽다 해야 할 것이다.
청소를 마치고 나도 집을 향해 나섰다. 배는 좀 고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 번 산수 시험 때에는 90점을 맞았는데 오늘은 95점을 맞았으니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번 시험의 경우, 시험지 등사가 잘못 되어서, 나는 열여덟 문제가 모두인 줄 알았는데 19번과 20번 문제가 더 있었던 탓으로 낭패를 보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아부지, 한 문제 빼놓고 다 맞었어라우."
"뭣이여? 한 문제 빼놓고? 한 문제는 왜 틀렸는디?"
"멫 시 멫 분인지 시간을 쓰는 문제였는디…"
"여그 시계 그림을 보면…7시 25분이구먼."
"첨에 7시 20분이라고 썼다가 잘 못 썼구나, 그래서 25분으로 다시 고쳐 쓸라고 그랬는디…"
"그란디, 선생이 못 고치게 한 것이여?"
"그거이 아니고 고무로 지우다봉께 답을 적어야 할 디가 빵꾸가 나부러서…"
"그래서 답을 안 적어뿐 것이여? 빙신같이. 그 위에나 아래나 옆에나…어디든지 성한 디다가 '25분'이라고 딱 써 놔야제. "
"네모 안에다 쓰라고 했는디…."
분명 시험문제는 '그림을 보고 몇 시 몇 분인지 □ 안에 적으시오'였다. 그런데 그 □가 구멍이 나버렸다. 그럼 이제 나는 □ 안에 답을 쓰라는 요구에 부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안 썼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나를 빙신 같다고 하였다.
'어뜬 아그들은 말랑말랑한 흰 고무(지우개)를 갖고 있응께 잘 지워지는디 나는 뻣세고 시커먼 고무라 잘 안 지워져서…'
나는 아버지가 좋은 지우개를 안 사준 탓으로 시험지가 구멍이 나버렸다고 항변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그 얘기는 안 하는 편이 나을 성싶어 입 밖에 내지 못 하였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지우개는 말이 지우개지 시커먼 타이어조각이었다.
"희찬이는 몇 점 맞은 것이여?"
"희찬이? 희찬이는 시험지가 빵꾸 안 났응께 백점 맞었제라우."
아버지가 낭패스런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비잉신 같이'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마을 전체가 60여 가호쯤 됐었는데 이씨와 마씨가 거지반을 차지하였고 김씨나 정씨 등은 우리 마을에서는 군소 성씨였다. 무엇보다 이장선거를 할 때 두 씨족간의 다툼은 치열했다. 이전에 이장을 했던 아버지가 이씨 쪽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뒤를 이어 이장에 당선된 희찬이 아버지는 마씨 쪽의 대표라 할 만 했다. 희찬이와 나는 단짝 친구였는데도 어른들은 자꾸만 우리 둘에게 자신들의 성씨가 새겨진 바통을 쥐어주며 상대를 이기고 오라고 부추겼다. 아마도 희찬이가 90점을 받았다면 아버지는 내가 받은 95점짜리 시험지를 앞에 놓고도 잘 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희찬이네가 우리 집보다 살림살이 형편이 나은 편이었지만 희찬이가 나를 부러워할 때도 있긴 했다. 희찬이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법도 없고 마을 사람들과 목소리 높여서 싸우는 법도 없는 반듯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희찬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섭다고 했다. 나도 아버지가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저녁, 마당에 밀집거적을 깔고 그 위에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홑이불을 덮고 누웠다.
"쩌그 저 별 말이여, 국자맨치로 생긴 저것을 북두칠성이라고 하는 것이여. 저 짝에 있는 저것은 견우성, 그라고 은하수 맞은 펜 짝에 있는 저놈은 직녀성이여."
그때 희찬이가 우리 집에 심부름을 왔다가 나에게 팔베개를 받쳐주며 조근 조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는데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리 아부지도 그랬으면 좋겄는디…."
희찬이는 그런 아버지를 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 나는 철이 들어가면서 가족의 생계를 나 몰라라, 방기하다시피 하고서 당신 기분대로만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씩 실망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선자 누나는 결국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 하고 5학년을 마치자마자 평일도에 애업개(남의 집 아기를 돌봐 주는 아이)로 가야 했다.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그것이 특별난 경우는 아니었다. 미리 말하자면 내가 속한 학급의 경우 입학할 때의 학생수가 84명이었는데 6학년을 온전히 마친 아이들은 84를 거꾸로 뒤집어서 48명에 불과하였다. 도중에 그만둔 아이들의 대부분은 여자아이들이었다.
'국문 깨쳐서 이름자래도 쓸 수 있응께 인자 되얐다.'
자녀를 퇴학시키려고 학교에 찾아온 부모들의 명분이 대체로 그러하였다. 선자 누나는 학교를 그만두던 날 집 뒤란에서 울었다. 설움이 복받친 나머지 어깨를 들썩거리고 울면서 사레들린 목소리로 토막토막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졸읍장도, 타고, 비잋나는, 졸읍장을, 타신, 언니께…후배들이, 불러주는, 그런, 노래도, 들어보고 자펐는디…."
나는 감춰놓은 빳지(딱지)를 가지러 뒤란으로 갔다가 선자누나의 우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는데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선호야, 오늘 공일날잉께 소쿠리하고 호매이 들고 엄니하고 뒷재 밭에 가자."
어머니는 일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침을 먹자마자 나를 끌고 뒷재로 향했다. 서 마지기쯤 되는 작은 밭뙈기였다. 밭 위쪽으로는 야산 언덕이었는데 돌무더기가 내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 있었다.
"자, 소쿠리에다 독(돌)을 담어서 쩌 넘에다 갖다 내뿔면 되는 것이여."
"이렇게 징하게 많은 독을 어치케 다 치우자고…."
"오늘 못 하면 낼 하면 되제. 나 시집오든 해에는 여그가 전부 독밭이었는디 내가 괭이로 파고, 소쿠리에 독을 줏어 담어서 이고 가서 내뿔고…고렇게 해서 밭 요놈을 맹글어 냈어야."
"왜 엄니 혼자 해. 아부지는 뭣하고?"
"느그 아부지는 동네 일 본다, 뭣 한다, 해서 늘 바쁭께."
아버지는 마을 이장은 그만두었지만 무슨 개발위원회 위원장에다 수협의 총대 따위, 나로서는 그 역할을 알 수 없는 감투를 차지하고서 그것들을 핑계로 밖으로만 나돌았다.
어머니와 난 돌무더기를 헐어서 소쿠리에 담은 다음 고놈을 낑낑거리며 들고 가서 밭둑 너머로 내다 버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무너지는 돌에 발가락이 눌리고 손톱에 시커먼 멍이 들도록 힘든 노역을 한나절 내내 했는데도 새로 확보한 땅은 두 뼘도 안 되었다. 집에서 가져온 삶은 고구마로 점심을 때우면서 나는 새삼스레 밀이 파종돼 있는 그 뒷재 밭을 둘러보았다. 그 밭을 순전히 어머니가 갓 시집 온 새색시 시절부터 맨손으로 개간해왔다 생각하니, 어머니가 장하게 여겨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마구 원망스러워지던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배가 아프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나는 남새밭으로 달려가 쓴물까지 모두 토하고 말았다. 배를 모두 비워냈는데도 복통은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배를 쓸어주면서 자꾸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에린 것을 데꼬가서 험한 일을 시킨 에미가 잘못이제."
그러나 이 때 뿐, 어머니는 그 뒤로도 논이며 밭이며 산으로 나를 끌고 다니면서 김도 매게 하고 거름도 내게 하고 나무도 하게 했다. 따라서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이전에 이미 농부에다 어부에다 나무꾼의 전 과정을 수료해버렸다.
아버지는 깜깜해져서야 집에 들어왔다.
"뭣이여? 배가 아프다고? 배깥에 가서 뭐 묵은 것 없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나하고 같이 뒷재 밭에 가서 하루 죙일 일하고 왔구먼. 참, 선호 너 거그서 뭔 열매 안 따 묵었냐?"
"딸(딸기)하고 멀구(머루) 따묵은 것 밲에는 없는디…"
내가 간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물례줘야 쓰겄구먼."
아버지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머니가 부엌으로 가더니 바가지에다 밥 몇 숟갈을 국에 말아들고서 토방마루에 갖다놓았다. 그 옆에는 부엌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물려주어야 겠다'고 한 것은 나에게 객귀가 들었으니 그 귀신을 물리치는 약식 물림굿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토방마루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아버지는 왼손에 든 바가지를 내 머리 위에 올리고 오른손에 든 식칼로 바가지를 세 번 탕탕탕 두드렸다. 그러고는 온갖 귀신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명태잽이 갔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귀신, 을축년 대홍수 때 강물에 익사한 귀신, 백운산 고개를 넘다가 짐승한테 물려 객사한 귀신, 기사흉년(己巳凶年) 때 배가 고파 주려죽은 귀신, 그 외 세상 모든 잡귀들은 이 칼 받고 썩 물러날 지어다, 훳시다, 훳시다 휫시다! "
아버지는 식칼의 칼등으로 내 머리를 이리저리 긋더니 마지막 '훳시다'라는 주문과 함께 들고 있던 칼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등불을 켜들고 있던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이고는 식칼을 집어 들고 와서 아버지에게 다시 주었다. 내 속에 든 귀신을 몰아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아버지의 물림굿이 다시 시작되었다. 네 번째 내던졌을 때에야 식칼의 칼끝이 사립바깥을 향했다. 아버지가 마당으로 내려가 칼이 떨어졌던 곳에 열십자(十)를 긋고서 교차하는 지점에 칼을 곶아 세웠고, 어머니가 그 옆에 음식이 든 바가지를 놓았다.
평소에 아버지는 장열이 아제가 뒷산을 넘어오다가 귀신을 만났다느니 도깨비에게 홀렸다느니 하며 허풍을 늘어놓을라치면,
"시상에 귀신이 어딨고 도깨비가 어딨어? 밤길이나 외진 길을 혼자 갈 때 기중 무서운 것은 바로 사람이여."
그렇게 말해왔었다.
그런데 복통을 호소하는 아들의 머리에 바가지를 올려놓고 객귀물림 푸닥거리를 하다니…. 그것은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비단 우리들에게만 그런 귀신물림 의식을 해준 게 아니라 이웃집 아이들이 두통이나 복통 따위를 앓았을 때에도 그 집에까지 찾아가서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생일이나 돌을 맞은 아이들을 위해서 그 집에 초대되어 가서는 염불인지 주문인지 하는 것을 읽어주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놓은 물건 중에서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유품이 바로 당신이 직접 쓴 백살경(百殺經)과 동토경(動土經)이다.
이제 내 안에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가 물림굿을 해주고 나면 복통이 조금쯤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거실의 과일 쟁반에 놓인 과도의 끝이 집 안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경우, 참지 못하고 다가가서는 그 끝을 창문 밖 쪽으로 애써 돌려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아부지는 총각 때 일본에 뭣하러 갔다 왔는디라우?"
마당에 거적을 펴고 나란히 누웠을 때 내가 물었다.
"아부지 이름이 건널 제(濟)자에다가 바다 해(海)자 아니라고. 이제해. 느그 조부님이 이름을 그렇게 지어줬응께 할 수 없이 바다를 건너간 것이제."
"그라먼 일본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소?"
"아녀, 뭔놈의 독립운동. 다들 돈을 벌어 보겄다고 간 것이여."
"그라먼 돈 많이 벌어갖고 왔소?"
"딴 사람들은 돈벌이에 열중해서 조깐씩 벌어갖고 왔제마는 나는 일본 가서 야간학교 댕긴다, 여그저그 귀경댕긴다 어짜고 하니라고 돈 한나도 못 벌었어."
"그랄 줄 알었어."
"뭣이여? 그랄 줄 알었다니, 이런 호로 자석을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