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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철거민 참사 당시 옥상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건물 아래로 떨어져 다리와 허리를 다친 지석준씨가 14일 오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당시 상황과 심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용산철거민 참사 당시 옥상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건물 아래로 떨어져 다리와 허리를 다친 지석준씨가 14일 오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당시 상황과 심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유성호

약 6개월 전인 지난 1월 20일 새벽, 지석준씨는 불타는 용산 남일당 건물 망루에 있었다. 망루에서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면서 두 다리가 모두 부러졌고,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졌다. 옥상에서 그를 부축해준 사람은 윤용헌씨와 이성수씨였다. 그들은 죽었고 지씨는 살아남았다.

현재 녹색병원에 입원 중인 지석준씨는 그날의 부상으로 아직까지 걷지도 못한다. 벌써 수술만 세 번째다. 워낙 부상 정도가 심해서 두 차례로 나눠서 다리와 허리를 수술한 뒤, 지난 8일 뼈가 튀어나온 오른쪽 다리를 다시 수술했다. 두세 달 정도 경과를 봐서, 뼈가 붙지 않으면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 그 뒤에는 재활치료도 받아야 한다.

그는 "아무래도 완치는 안 되고 보행도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일상생활에만 지장이 없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두 번 떨어지고 살아남은 나야 '신의 아들'이지."

"옥상에 쓰러진 날 부축해준 두 사람, 왜 망루에서 불타죽었나"

 1월 20일 화재를 피해 건물 아래로 추락한 지석준씨의 모습.
1월 20일 화재를 피해 건물 아래로 추락한 지석준씨의 모습. ⓒ 권우성

그날 남일당에서 지석준씨는 자신이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미 다리가 부러져 불구덩이 속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불에 타죽는 것보다는 땅에 떨어져 죽는 게 그나마 덜 고통스럽고 적어도 시신은 온전하겠다 싶어서, 그는 옥상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조립식 가건물에 떨어지면서 충격이 다소 완화됐다. 바로 땅에 떨어졌으면 죽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그날 지석준씨는 정신이 또렷했다. 바닥에 떨어진 뒤 "너무 춥다"고 말했고, 소방관들이 이불을 가져다가 그를 덮어주었다. 병원 응급실에서도 아내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똑바로 불렀다. 아내에게 "입었던 옷을 집에 가져가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살았기 때문에, 옥상에 함께 있었던 윤용헌씨와 이성수씨도 살았을 줄로만 알았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깨어난 뒤에야 두 사람의 죽음을 알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사고 이후 그는 한 달 반 가까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밤새 땀을 흘리면서 아침을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미술치료를 받으면서 마음이 안정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매일 새롭고, 아직도 망루에 크레인이 올라오던 순간이 생생하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이 불에 타죽은 게 아니라 용역업체 직원들과 경찰들에 맞아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지석준씨의 증언이다. 두 사람의 시신은 망루에서 발견됐는데, 지석준씨는 옥상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지씨는 기자에게도 "경찰도 동료가 죽었는데 우리를 가만두겠냐, 두들겨 패다 보니 쓰러지거나 죽었고 그러면 불구덩이에 넣는 게 좋지, 상식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세 명 중 윤용헌씨가 먼저 망루에서 뛰어내리고 이성수씨가 마지막에 뛰어내렸다. 이성수씨가 지석준씨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지씨가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게다가 지씨는 "옥상 난간에 쓰러져 있는데 윤용헌씨가 '승우(지석준씨 아들 이름)야, 빨리 일어나'라고 불렀고 이성수씨가 나를 불타는 망루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면서 "옥상에 장애물이 있어서 두 사람이 나를 부축해 난간까지 데려갔다"고 말했다. '소설'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술 내용이 구체적이다.

무당의 대예언, 올 추석이면 싸움이 끝난다?

 용산철거민 참사 생존자인 지석준씨.
용산철거민 참사 생존자인 지석준씨. ⓒ 유성호
그날 순화동 철거민대책위 총무인 지석준씨는 위원장인 고 윤용헌씨와 함께 용산에 '연대(연대투쟁)'하러 갔다. 그리고 "미안해서, 남아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망루에 남았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또 용산에 망루를 세운다면 다시 갈 거고, 그때는 더 잘하고 싶다.

그가 용산 철거민들과 함께 싸우는 것은 자신이 "당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내 가게 털리는 게 얼마나 억울하던지…, 안 당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면서 "나도 당하기 전까지는 내 얘기 아닌 줄 알았다"고 말했다.

지석준씨는 지난 2001년 순화동에서 '고창 민물장어 나루'를 열었다. 2층짜리 건물에 테이블이 11개인 작은 가게였지만 어엿한 사장님이었다. 처음에는 일하는 아줌마 2명을 두다가 수지가 안 맞아서 내보내고 그와 아내, 어머니만 일을 했다. 세 식구는 밤 12시까지 일한 뒤 새벽 6시에 염천교 옆 중림동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왔다.

'데리(데리야끼 장어소스)'를 제대로 뽑고 단골을 만드는 데 2년이 걸렸다. 대박은 아니었지만,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저축도 하면서 갓난애 분유값 걱정 안 할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가게는 경찰청 맞은편에 있었는데, 내사과·외사과 소속 경찰은 물론 인근 서대문경찰서의 정보과 경찰들도 단골이었다. 나중에 재개발이 시작되자 경찰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쫓겨납니까? 사장님, 투쟁하세요"라고 그를 응원하기도 했단다.

지역에서 '재개발' 얘기가 들린 것은 장사가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안 된 2005년이었다. 그 해 순화동 상인번영회는 '순화동 철거민대책위원회'로 바뀌었고, 세입자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의 행패나 철거를 막기 위해서 조를 짜서 동네 규찰을 돌았다. 다른 철거지역에 연대도 나갔다.

당시 상황을 그는 "총칼만 안 들었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표현했다. 그래도 철거를 막지는 못했다. 2007년 9월, 대책위 총무인 그의 가게가 먼저 철거됐다.

"용역 300마리(용역업체 직원들을 그는 '마리'로 셌다)가 몽둥이를 들고 새카맣게 들어왔어요. 오전 9시에 우리 식구들은 자고 있었는데 일단 애기랑 어머니를 윤용헌씨 가게에 맡겼어요. 용역들이 워낙 함부로 하잖아요. 애기고 여자고 없어요. 그런데 매일 조마조마하다가 털리고 나니까 마음은 오히려 편하대요. 어차피 안 당할 것도 아니고."

"용역 300마리가 가게 털어가는데... 얼마나 억울하던지"

그 아찔한 순간이 이미 2년 전 일이다. 그동안 이미 많은 순화동 철거민은 투쟁을 포기하고 이주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지석준씨는 기어코 끝까지 싸워 임시상가를 얻어낼 생각이다.

지씨는 "상가 수요가 늘어나니까 주변 집값은 오르는데 보상금으로 어딜 가냐, 옮긴 지역에서 또 재개발하면 또 싸울 거냐"고 반문했다. 지씨는 아예 감정평가를 거부했지만 조합이 임의로 매긴 평가에 따르면, 그가 직접 타일을 붙여가며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가게는 1300만원짜리다.

몸이 낫는 대로 투쟁도 다시 할 생각이다. 끔찍했던 용산참사 현장에 돌아가 연대하는 것도 겁나지 않는다. 그는 "철거민이 있고 전철연 깃발이 있는 데는 다 가야죠, 목발을 짚고서라도, 기어서라도 갑니다"라고 말했다.

사고가 난 뒤에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아내도 '투쟁노선'을 지지했다. 애초 "누군가 투쟁해야 하는데 누가 할 거냐"고 논의를 한 끝에 남편은 투쟁, 아내는 생계를 각각 책임지기로 한 부부다. 지금도 그의 아내는 파출부로 일하고 있다.

아내는 답답한 마음에 점을 봤는데, 무당은 추석쯤 싸움이 끝날 거라고 했단다. 그대로 된다면 참으로 용한 무당이다. 벌써 용산참사 6개월, 꼼짝 않고 있는 정부를 보면 아무래도 예언이 적중하긴 어려울 것 같다. 지씨는 '특수공무집행 치사 또는 치상'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상태다. 퇴원한 뒤 곧바로 구속될 가능성도 있다.

지씨는 "우리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까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 잠이 안 왔다"고 말했다. 그는 "진압작전이 떳떳하면 검찰이 수사기록 3천쪽을 왜 안 내놓겠냐, 그 안에 윤용헌씨와 이성수씨 죽음 의혹에 대한 내용이 다 있나 보다"고 말했다.

그의 발바닥은 아기 같았다

 지난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부근 재개발 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 설치된 철거민 농성용 가건물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불길에 휩싸인 가건물이 무너지고 있다. ⓒ 권우성

지석준씨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축해준 윤용헌씨를 "가무도 좋아하고 입담도 좋아서 항상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 성격 알지 않냐, 사람이 약아가지고 어디든 짱박혀 있다가 꼭 살아나올 줄 알았다"면서 윤씨의 죽음을 인정하기 힘들어 했다.

지금도 그는 자기 가족보다 윤용헌씨 가족이 영 마음에 걸린다. 둘째 아들 상필이가 시력이 안 좋아서 얼마 전 수술을 받은 것도 걱정이고, 형수(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가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도 걱정이다. 그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승우 유치원비만 조금 들어가고, 새발의 피죠"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지씨는 지금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특히 두 달 동안 똥오줌을 받아내며 자신을 간병한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6개월을 안 걸어다니니까 (왼쪽 다리 양말을 들쳐보이면서) 굳은살이 다 빠져서 보들보들 애기 발바닥 같아요. 내가 지금 딱 마흔 살인데, 서른아홉해 동안 생긴 굳은살이 다 사라진 거죠. 새 인생을 얻은 거예요."

행복한 지석준씨는 앞으로의 투쟁 전망도 밝게 봤다. "끝이 안 보이는 싸움"이라면서도 "잘될 거다"고 말했다. 아들 승우는 "나쁜 사람들이 부쉈는데 가게 언제 다시 할 거야?"라고 아빠를 보챈다. 그는 싸움을 마친 뒤 아들의 바람대로 다시 장어집을 할 생각이다.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윤용헌씨가 하늘에서 잘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었지만, 아직도 두 사람은 동지였다.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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