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과 얼마 전 작은 산악회를 만들었다.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해도 마음이 설레고 그저 산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설렌다는 의미에서 가칭 '설렘산악회'로 정해 놓고 있지만, 산악회 이름을 두고 목하 고민 중이다. 지금까지 불일폭포만큼 아름다운 폭포를 본 적이 없다는 내 말에 지난 11일, 우리 산악회 사람들은 하동 쌍계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를 거쳐 불일폭포를 보러 가게 되었다.
오전 8시 50분께 김해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쌍계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낮 12시 15분께.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느긋한 걸음으로 쌍계1교를 건너갔다. 얼마 가지 않아 왼쪽에 쌍계(雙磎), 오른쪽에 석문(石門)이라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나왔는데, 신라 시대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글씨라 흥미로웠다.
최치원의 글씨는 쌍계사 대웅전 아래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에서도 볼 수 있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범패(梵唄)의 맑은 소리로 대중을 교화했던 신라 말의 고승인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기리는 탑비로 최치원이 그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쌍계사가 지리산 남쪽 기슭에 처음 자리한 것은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삼법, 대비 두 화상이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스님의 정상(頂相), 즉 머리를 모셔 와 봉안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감선사 혜소가 문성왕 2년(840)에 그 절터에다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다시 지어 선(禪)과 불교 음악인 범패를 가르치다 77세로 입적하였다.
그러면 언제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이웃 고을에도 옥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는데다 산문(山門) 밖에서 두 개의 시내가 만난다 하여 신라 제50대 정강왕이 쌍계사(雙磎寺)라는 절 이름을 내리게 되었다.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일주문(경남유형문화재 제86호)과 금강문(경남유형문화재 제127호), 천왕문(경남유형문화재 제126호)을 차례로 지나서 우리는 금당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쌍계사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불일폭포까지는 돌길이 계속 이어진다.
비가 내려 후텁지근했지만 계곡물이 시원스레 흘러가는 소리에 더위가 좀 가셨다. 살얼음이 낀 아이스커피와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또 걷기 시작했다. 오후 1시 20분께 불일평전에 있는 불일휴게소에 도착했다. 아담하고 참 예쁜 휴게소이다. 조그만 연못도 만들어 놓았고 소망을 간절히 비는 돌탑들도 있다.
거기서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는 곧장 불일폭포 쪽으로 걸어갔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불일폭포가 있었다. 마치 북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듯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더 우렁찼다. 나는 기뻐서 환호성을 질러 댔고 감격스러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드디어 불일폭포가 우리들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내가 물방울이 되어 부서집니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갑자기 물소리가 그치고 무지개가 어립니다 무지개 위에 소년부처님 홀로 앉아 웃으십니다 - 정호승의 '불일폭포'하늘에 고여 있던 물이 한데 모여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장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불일폭포. 위아래 2단으로 되어 있고 높이 60m, 너비 3m인 불일폭포의 위용에 여름이 옷을 벗었다! 나를 던져 물방울로 하얗게 부서지고 싶었던 불일폭포. 나는 그저 폭포를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만 쭉 들이켰다.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그 폭포 부근에서 수도를 했는데, 그가 입적하자 희종이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로 폭포 이름도 불일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불일폭포를 뒤로하고 지눌이 수도했다는 불일암에 잠시 들렀다. 오후인데도 정적이 감도는 그곳에서 다람쥐를 보았다. 낯선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화들짝 놀랐는지 쪼르르 달아나는 모습에 괜스레 미안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져 우리는 불일휴게소로 다시 내려가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오후 2시 10분께 그곳에 도착하여 김밥 도시락과 얼려 온 포도, 물김치 등을 배낭에서 꺼내 맛있게 먹었다. 정말이지, 비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다정한 이야기가 있는 낭만적인 식탁이었다.
그런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사실 상불재까지라도 산행을 하려 했는데 우리는 비 때문에 그냥 쌍계사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쌍계사로 내려온 시간이 3시 40분께. 비 내리는 절집 분위기도 좋았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절집을 한번 찾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곧장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보러 갔다. 갈라지고, 깨어지고, 비 몸돌에 손상이 많아 마음이 아팠다.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불교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쌍계사 팔영루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범패를 만들었는데, 팔영루는 오랫동안 범패 명인들을 배출하는 교육장 역할을 해 온 셈이었다.
대웅전(보물 제500호) 동쪽으로 고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경남문화재자료 제48호)이 있다.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하였다. 그래서 쌍계사 마애불은 여느 마애불과 달리 감실 안에 봉안한 불상 같아 보인다. 게다가 불상이 스님으로 보일 만큼 순박한 모습이다. 그 바위 위로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간절히 빌고 싶은 것일까?
너무나 과학적인 칠불사 아자방지로
우리는 쌍계사 매표소 아래에 위치한 용운식당에 들러 산수유 열매를 띄운 동동주를 곁들여 감자전을 사 먹었다. 비 오는 날에는 빈대떡을 부쳐 먹는 게 제맛이지만 감자전도 상당히 맛있었다. 우리는 쌍계주차장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는 칠불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로 가서 아자방지(亞字房址,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를 구경하기로 했다.
절집 이름이 왜 칠불사(七佛寺)인가? 1세기 무렵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이곳에 왔는데, 수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成佛)했다 하여 칠불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칠불사에는 '아자방'이라 불리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지은 이중 온돌방으로 길이가 8m 정도가 된다. 그 방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부른다. 이 온돌은 초기에는 한번 불을 때면 석 달 넘게 따뜻했다고 한다.
아자방의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쪽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고, 가운데 십자형으로 되어 있는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곳이다. 이중구조의 이 온돌은 방 어느 쪽이든 똑같은 온도를 유지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리는 밤 9시가 되어서야 마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구찌개가 유명한 단골 식당에 바로 들러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불일폭포, 쌍계사, 칠불사 이야기를 즐겁게 주고받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남원 → 19번 국도 → 구례읍 → 구례 서시교에서 하동 방면 19번국도→ 화개장터 →쌍계사 →불일폭포
* 남해고속도로 하동 I.C → 하동읍, 19번 국도 → 화개면 탑리 쌍계사 방면 지방도 →쌍계사 →불일폭포
*쌍계1교를 건너가면 쌍계사 무료주차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