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대선 전에 '반값'이라는 말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반값 아파트, 반값 등록금, 반값 사교육비. 민주정부라지만 생활고에는 별 도움이 안되어 살기 힘들었던 '서민'들로서는 설마 하면서도 이런 말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공약이라는 것이 집권하고 보면 지키기 쉽지 않은 게 많은 법이다. 하지만 국민이 뽑은 정부라면 내놓은 말을 웬만큼은 지켜보려고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저렴한 공공 임대아파트를 대폭 공급함으로써 집값을 떨어뜨리는 것은 이명박정부의 지향과 워낙 반대 방향이라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반값 등록금은 좀 시도해보지 않을까 싶었다. 5조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하니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저소득층 자녀들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설계하면 훨씬 적은 예산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부터 지난 가을인가 방송에 나와 그런 공약을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이한구 의원(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약속은 했지만 언제 이행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전 한나라당 제5정책조정위원장)은 등록금이 아니라 심리적 부담을 반으로 줄여주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의 '빌려온 항아리의 우화'가 생각나게 하는 요설들이다.
*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나오는 '빌려온 항아리의 우화'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항아리를 빌려주었는데 돌려받을 때 보니 항아리가 깨져 있었다. 빌려간 사람에게 항의하자 그가 열심히 변명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 세가지 이야기가 어지럽게 뒤섞인 것이었다. "나는 항아리를 빌려간 적이 없다." "그 항아리를 빌릴 때부터 깨져 있었다." "내가 돌려줄 때 항아리는 깨져 있지 않았다."
국민을 '낚은' 반값 등록금 공약
그러고는 다들 낚였다는 심정으로 '반값' 따위는 잊어버렸다. 하긴 반값은 고사하고 지금 이 정부에서 뭐라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집단이 미디어법 개정을 앞두고 꿈에 부풀고 그래서 노심초사인 보수신문사와 4대강사업 관련 건설업체를 빼면 있기나 한지조차 모르겠다. 그럴 쯤 이명박 정부가 '서민정책' 운운하며 나섰다. 고작 지지율 30%를 넘기기는 게 목표가 돼버린 정권이긴 해도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아 20% 수준으로 납작 기고 있는 지지율이 견디기 어려웠던 듯싶다.
하지만 그 '서민'이라는 것도 억울하게 죽은 용산 철거민,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 대상자,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사람들은 모두 포함되지 않는 터라 누군지를 알기 어려웠다.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해서 어묵 먹는 걸 보면서 비로소 이 정부가 생각하는 '서민'이 누구로 한정되는지 알게 됐지만, 한껏 기대에 부푼 그들에게 대형마트를 막아줄 수는 없으니 인터넷 직거래나 해보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보니 서민 '정책'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사교육비 관련 정책이다. 스스로도 머쓱했는지 '반값'이라는 말은 안 쓰고 겸손하게 '경감'이라는 말을 붙인 이 정책들은 곧장 언론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이 뭔가 들여다보면 미래기획위원회, 교과부, 한나라당이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핵심을 간추리기 쉽지 않다. 게다가 그 다른 이야기의 행간에 집권세력 내부의 이견과 상호견제와 갈등이 깊게 배어 있고, 그만큼 설익은 것들이라 뭐 이런 걸 꺼내들고 나대는가 싶어 불쾌하기조차 하다.
중구난방 대책들 속에 실종된 교과과정 개혁
중구난방으로 나온 것 가운데 몇가지만 보자. 학원교습을 밤 10시까지로 제한하고 위반사례를 고발한 사람들에게 현금 포상을 한다고 한다. 금세 '학파라치'라는 희한한 말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청년실업 완화대책으로 보이지 교육정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미FTA라도 발효되면 외국자본들이 이미 거액을 투자한 대형학원들과 국가 간에 투자자-국가 소송이 벌어질 판인데, 한미FTA 비준동의를 열망하는 정부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신등급을 현행 9등급에서 5등급으로 줄이겠다고도 한다. 참여정부가 추구했던 정책을 다시 꺼내드는 건 이 정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신선하긴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 정책임을 벌써 잊은 것으로 보아 기억력 부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신을 절대평가제로 바꾸겠다는 이야기와 내신과 논술만으로 치러지는 수시입학전형 이야기가 동시에 나온다. 몇년 전 내신이 절대평가일 때, 한심한 수준으로 쉽게 출제된 고등학교 시험문제를 대서특필하며 개탄하던 보수신문들이 지금은 말이 없다. 어쨌거나 절대평가로 이뤄진 내신만으로 수시전형을 할 대학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과목을 줄이거나 그런 과목 가운데 두가지로만 수능에 응시하도록 하는 방안도 있다. 문제가 있는 현행 교과과정 자체를 침착하게 손 볼 생각은 없고, 시험과목이나 교과과정 수만 줄이면 사교육비가 줄어든다는 생각이다. 그 외에도 한 두름의 정책이 있지만 기중 쓸모있는 것은 시간강사제도 개선방안뿐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대중적 관심도가 낮기 때문에 후순위로 밀리다가 유야무야 될 가능성이 크다.
입시제도만 주무르는 게 과연 교육정책일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정권 내부의 조율이 이뤄지면 꽤 추진력이 붙을 것이다. 여론의 뜨거운 반응에 정부가 고무되어 있기 때문인데,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사실 그 가운데 상당부분이 입시제도의 변화와 연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성원들은 입시제도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입시제도의 변경과 관련해서는 공적 토론보다 적응과 그것을 위한 정보추구가 우선한다.
그러니 정부는 제도 변화가 야기하는 불안감 속에서 적응을 위해 열심히 주판알을 굴리고 있는 학부모와 학생의 모습, 그리고 그들에게 해설기사를 공급하기에 여념 없는 언론의 행동에 고무되어 있는 셈이다.
정책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정책에 대한 적응행동조차 고무적인 일이 된 정부의 처지에 동정심이 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입시제도의 변경은 항상 단기적으로 그런 반응을 낳게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적응할 수 있는 것에서는 적응하고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 저항을 조직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그저 많은 사람들은 피곤할 뿐이다.
정부가 사교육비를 경감시키겠다는 의지에 진정성이 있다면, 학부모들이 사교육비에 허덕이고 학생들이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입시준비에 내몰리는 이유가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임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좋은 대학을 지금보다 더 여럿 만들고 대학서열을 완화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4대강사업보다는 훨씬 적게 들 것이다.
중소기업과 재벌 사이의 불공정거래를 줄여서 중소기업에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청년실업 해결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고 비정규직을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하나 둘인 자식을 애지중지 키워 비정규직을 만들 생각은 아닐 뿐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 아이조차 적게 낳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들은 도외시하고 입시정책만 주무르는 것은 돈 한 푼 안 드는 안이한 정책으로 사회성원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정책의 환상'을 탐닉하는 것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