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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자동차 사측이 공장 내 단수를 실시한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금속노조 주최로 열린 '정리해고 분쇄 결의대회'를 마친 뒤 금속노조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점거농성중인 노조원들에게 생수를 공수해 건네주자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생수를 옮기고 있다.
쌍용자동차 사측이 공장 내 단수를 실시한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금속노조 주최로 열린 '정리해고 분쇄 결의대회'를 마친 뒤 금속노조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점거농성중인 노조원들에게 생수를 공수해 건네주자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생수를 옮기고 있다. ⓒ 유성호

쌍용차 관련 보도를 보다가 경악해서 이 글을 쓴다.(관련기사: 쌍용차 사측, 물-가스 공급 차단 / 노조 간부 아내, 자택서 목숨 끊어 - 오마이뉴스)

쌍용자동차 문제는 이제 단순한 한 기업의 생존 문제를 넘어 수많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생존문제가 되었고, 더 나아가 경제위기를 맞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그 고통을 분담하고 미래를 기약해야 할 것인지, 돈과 기업 위주의 해결책을 찾을 것인지, 사람과 생활 위주의 해결책을 선택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그런데 농성 중인 노조원들에게 최소한 식량과 의약품 등은 전달하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 쌍용차의 기획재무본부 본부장(상무)이라는 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공장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식량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하는데, 범법자들에게 인도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일단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쌍용차 문제에 대해 노측의 입장에 가깝든, 사측의 입장에 가깝든 그런 것은 따지지 말기로 하자. 식량이 전달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입장 차이도 잠시 접기로 하자. 우선은 인도주의라는 단어가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 그러면 그 배후에 숨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드러날 것이다.

인도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방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것들을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의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범법자이건 아니건 인도주의적으로 물품을 제공하자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범법자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물품 제공이 불가하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인도주의의 챔피언이라 할 수 있는 적십자사를 보자. 그 기본적 이념은 조금 전까지 우리 병사를 죽이던 적군이라 해도 생명을 보호하고 치료해 준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인도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어떤 인간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보편성이야말로 인도주의가 인도주의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것이다.

기사에 인용된 발언에 따르면, 쌍용차는 과연 어떤 경우에 한해 노동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한다는 말인가. 혹시 이전에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식사나 물 등을 회사는 인도적 지원이라고 생각하며 제공했단 말인가? 졸지에 쌍용차 직원들이 굉장히 불쌍하게 보이는 지점이다.

식당에 가서 돈을 낸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인도주의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돈을 내지 못하는, 따라서 식당주인에게 음식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한 불쌍한 사람에게 거저 음식을 제공할 때 인도주의적이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적십자사가 관타나모에 있는 수용자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펼칠 때, 그리고 미국정부가 제한적이나마 이를 허용할 때, 이들이 범법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설사 범법자라고 해도 그런 지원을 받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 인도주의가 표방하는 생각인 것이다.

때로는 단어 하나의 사용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인도주의에 대한 쌍용차 관계자의 발언 역시 쌍용차 사측이 노측을 대하는 입장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노측은 범법자이며 인도주의적 고려의 대상도 아니라고 말할 때, 이들에게 노동자는 이미 인간조차 아닌 것이며 따라서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 역시 들어설 곳이 없는 것이다.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그 관계자 한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를 통해 드러난 쌍용차 사측의 인식,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잔인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걱정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그간 우리 사회가 인도주의 혹은 인권과 같은 가치를 소홀히 생각하고 무시해온 역사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쌍용차 정도의 회사에서 상무에 오를 정도라면 굉장히 똑똑한 사람임이 틀림 없을 테고, 그의 성장과정 혹은 교육과정 중에 단 한번이라도 인도주의나 인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제공되었다면 적어도 이런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적어도 내 경우,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그런 기회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인도주의나 인권 더 나아가 사람을 중요시하고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성숙한 사회는 경제적 성장에 부록처럼 딸려오는 무료제공 서비스가 결코 아니다. 의식적으로 이를 교육하고 중시하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반 세기 넘도록 이를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매우 훌륭하고 똑똑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논의의 수준이나 실천의 내용은 전혀 성숙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은 소외되고, 경쟁에서 탈락하면 무자비하게 버려진다. 성공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긴장의 나날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 개인과 사회가 불화하는 사회. 이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의 모습이 아닐까?

돈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사회가 개인을 배려하면서 약자도 강자도 자신의 상황에 맞게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부럽지 않은가? 이런 세상은 절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 선진국들의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의 큰 방향을 돌리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소한 우리 다음 세대에라도 그런 세상이 오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지금도 너무 늦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내용은 어떤 단체의 입장과도 관계없는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기사는 앰네스티 일기 블로그(http://www.amnestydiary.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쌍용차#인도주의#식량#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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