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못지않게 수사에 혼선을 주는 것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장난 전화였다. 가뜩이나 충격과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에게 3,40대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 자기가 범인인데 아이에게 개와 고양이를 사 주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이의 유품인 셈인데 지금 자기 집에 있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빨리 오지 않으면 개와 고양이가 굶을 거라고 걱정하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수사에는 진전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수경을 비롯한 경찰청 범죄분석팀은 애초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범인은 현장 주변에 거주지가 있으며, 범행 동기는 성욕이라는 두 가지 점이었다.
2주쯤 후 사건은 다소 싱겁게 해결되었다. 송파서의 형사반장이 현장에 들러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가 3년 전 쯤에 어린이 성추행범을 잡아넣었던 기억을 문득 되살린 것이었다. 그때 범인은 2년 6개월 형을 받았으니 지금은 교도소에서 나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형사반장은 경찰청 범죄분석팀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인근의 행랑채와 반 지하 또는 창고형 방 들을 다시 끈질기게 수색하고 있던 차였다. 형사반장은 3년 전의 성추행범이 주민 등록 이전을 최근에 한 탓으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형사반장은 부하 둘과 함께 성추행범의 거주지를 찾아갔다. 용의자의 지하 쪽방은 출입구가 마치 폐기된 창문처럼 붙어 있어서 주인과 사용자 말고는 있는지조차 알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기 탐문 수사 때에도 형사들이 못 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형사반장은 집 주인의 양해를 얻어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구석에 S사의 B형 냉장고가 있었다. 냉동고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었고 방구석의 낚시 가방에는 어린아이의 멜빵이 들어 있었다. 부엌에는 예리한 칼과 톱이 있었고 사체를 싼 것과 같은 종류인 검은 비닐봉지도 있었다. 그만 하면 토막살인의 물증이 되기에 충분했다.
범인 최형구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그는 야간 근무를 했던 양평의 공장에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인근 모텔에 들어가 나머지 사체 조각을 버렸다고 했다. 그는 20대 중반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세 개를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사귀던 여자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이성 관계에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는 이제 정상적인 이성 교제를 포기하고 사창가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성적 교감이나 친근감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많은 여자를 만나 본 끝의 결론은 모든 여자들이 돈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손가락이 없으니 돈이라도 많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의 만남 제의를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돈을 벌 기회나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밝히지 않는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돈을 밝히지 않는 새로운 여자란 곧 어린이였던 것이다.
제4장 법원· 검찰청송파 어린이 토막살인사건에 대한 수경의 프로파일링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어. 아마도 미국 같으면 그 사건 하나만으로 조수경 수사관은 대단한 프로파일러로 부각되었을 거야. 그런데 아쉽게도 수사팀 내부 몇 사람만 수경의 범죄 분석 능력을 새롭게 인정하는 정도였지. 아무튼 송파 사건의 범인을 신문한 결과, 이 사건은 이전에 발생했던 판교여인살인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지. 판교사건은 송파사건의 관심에 묻힌 데다, 뒤이어 있었던 한국 야구의 세계대회 4강 진출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에서 거의 지워지다시피 해졌지. 한국의 스포츠 애국주의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어. 한국 언론은 한국의 스포츠 팀이 세계대회에 나가 선전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치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더군. 나는 지금도 한국 언론의 프로파간다 기량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어. 특히 스포츠에 관한 한 좌우, 빈부의 구별이 없더군. 모든 언론이 스포츠 선수들을 애국전사로 만들고, 하나같이 연일'이겼다, 또 이겼다!'식으로 보도를 하곤 했지. 좌파 언론이라는 말을 듣는 <한겨레신문>까지 사설을 통해 자못 흥분감을 드러냈어. 만약 한국 언론의 선동 마인드를 히틀러나 괴벨스가 배웠더라면, 2차대전의 승부도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그토록 음전했던 한민족이 불과 몇 십 년 만에 이렇게 된 것은 한마디로 엽기적인 일이지. 이제 우리들의 현안을 논의해야겠군. 수경도 기억하고 있듯이 새로운 살인사건이 터진 것은 야구가 끝나자 마자였어.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판교사건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지. 대부분의 정황이 판교사건과 흡사했으니까. 마침내 경찰청에서도 연쇄살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 수경은 아마 그날로 수사부장의 부름을 받았을 거야."조 팀장, 우리가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어."
요즘 들어 업무에 의욕을 잃은 용 부장이었지만 사건이 사건인 만큼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남자야."
용 부장의 말대로 피살자가 남자인 것 말고는 거의 모두가 판교사건과 유사했다. 피살자는 납치되었다가 일정 기간 후 살해되었으며, 피살 장소와 사체 발견 장소가 달랐다. 사체 유기 장소에 지문이나 혈흔, 모류나 족적 등의 증거물이 전혀 없다는 점도 판교사건과 같았으며 무엇보다 사체의 등에 글씨가 서 있는 점이 동일했다.
"사체가 유기된 장소는 어딘가요?"
"놀랍게도 서울 시내 강남 한복판이었어."
사체는 서울 강남 서초구 법원· 검찰청 뒷산에 유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GREED'라고 쓰여 있나요?"
"...아니야."
용 부장은 보일 듯 말 듯 턱을 흔들 뿐 더 이상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서류뭉치를 조수경에게 건넸다.
50대로 추정되는 남자의 사체에는 뜻밖에도'THE CONSERVATIVES'라는 영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판교사건처럼 B.K.라는 이니셜도 있었다.
조수경은 범인이 남긴 글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conservative' 라고 하면 '보수적인' 또는 '수구적인'의 뜻을 갖는 형용사였다. 그런데 범인은 의도적으로 정관사 'THE'를 붙이고 단어의 마무리를 복수로 처리했다. 그렇다면 'THE CONSERVATIVES'는 보수파 혹은 수구파(守舊派)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조수경은 왜 용 부장이 말하기를 주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판교의 여인이 탐욕적인 인간이라서 죽였다면, 이번 50대 남자는 보수파 또는 수구파라서 죽였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었다. 피살자의 신원은 곧 확인될 것이다. 정말 희생자가 수구파라서 죽였고, 그것이 언론 보도를 탄다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이만저만이 아니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조수경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식으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대상을 물색하여 연쇄살인을 하는 경우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덧붙이는 글 | 표창원 교수의 역저 <한국의 연쇄살인>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