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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이… 뭡니까?"

때는 바야흐로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 이회창, 노무현 두 유력 후보는 혹 말 한 마디라도 실수를 하진 않을까,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시점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옥탑방

 책은 격랑의 청춘을 사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
 책은 격랑의 청춘을 사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다.
ⓒ 행복한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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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토론회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그만 옥탑방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결정적 한마디를 남겼다.

이건 뭐, 요즘 말로 하면 '울트라 슈퍼 떡밥'인 셈이었다. 명색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이가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옥탑방을 모르다니.

이곳저곳에서 날아드는 맹공. 그야말로 융단폭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회창 후보는 그날 술 없이 잠을 못 이루지 않았을까. 그런데 다음날 입이 떡 벌어질만한 일이 생겨버렸다.

"그런 생활 형태에 대해선 알고 있었으나, 저도 사실 그 용어 자체는 모릅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받았던 노무현 후보. 그냥 태연스럽게 이렇게 말해버린 것이었다. 차암… 뭐라고 해야 할까. 하늘이 내린 공격기회를 날려 버리다니. 노 후보 측의 황망함과 허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그런데 이 사람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말했단다.

"그날 TV를 보면서 내가 옥탑방의 뜻을 몰랐다는 걸, 건호(아들)가 안다. 그런데 어떻게 안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

안쓰러울 정도의 순진함, 멍청할 정도의 솔직함, 혹은 그마저도 정치적 계산으로 바라볼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한때… 있었다. 어쨌건 말 많고 탈 많았던 옥탑방. 그곳에는 지금도 사람이 산다. 아니 살아나가고 있다.

부산 처녀, 달콤 살벌한 서울 정착을 꿈꾸다

 진짜 '차카게' 살고 있는 조폭 브라더스도 그녀에겐 즐거운 이웃.
 진짜 '차카게' 살고 있는 조폭 브라더스도 그녀에겐 즐거운 이웃.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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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로망스>는 가진 거라곤 ××두 쪽이 아닌, 젊음과 열정밖에 없는 부산 아가씨의 좌충우돌 서울안착 투쟁기다. 마치 먹이사슬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야생의 세렝게티 초원 같았던 서울살이. 20대의 아리따운 처자(본인 표현)가 견디기에는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야생 다큐다.

일찌감치 세상을 발칵 뒤집을 화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그림만 그려댔으나, 아그리파가 캐릭터화 되는 손가락의 저주를 깨닫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던 그녀. 새 꿈을 위해 주야장천 만화만 파다가 이번엔 만화를 게임화한 게임에 꽂히고 말았다. 결국 게임 회사에 반 낙하산(?)으로 사뿐히 안착. 게임도 하고 나름 현금과 신용카드의 맛을 알아가던 찰나!

게임을 소재로 써냈던 글이 괜찮은 반응을 얻고 뒤늦게 글쓰기의 묘미를 깨달으면서,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병이 난, '꿈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의 길로 빠져버렸다. 현실은 극악무도 그 자체. 닥치는 대로 써 왔지만, 꿈은 옆집 옥상의 빨래처럼 나풀거릴 뿐. 

600원에 맞게 마음을 세팅해 왔는데 그 물건이 없을 때의 당혹감! 그런데 이건 대놓고 700원이라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안심탕면 올랐나요?"
"이번에 라면 값이 100원 정도 올랐어요."
헉, 그 사이에 100원이나 뛰다니,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져 옴을 느꼈다. - 본문 중

하지만 그럴수록 또렷해지는 꿈 하나. 언젠가 <빨강머리 앤> 처럼 시대와 연령을 뛰어넘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글을 써내고 싶단다. 이 언니, 스스로 표현하시길 미련하게 글을 쓰는 동네 백조 언니란다.

홀로 선다는 것, 혹은 산다는 것의 의미는

 그녀의 지난한 서울 분투기를 함께 한 복댕이와 삼식이는, 나름 비중있는 조연(?)이다.
 그녀의 지난한 서울 분투기를 함께 한 복댕이와 삼식이는, 나름 비중있는 조연(?)이다.
ⓒ 박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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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은 그 단어자체만으로도 푸르고 청아하다. 딱 그 나이였다. 따뜻하고 또 따사로운 보호의 손길을 떠난 저자 '봄날 꼬냥이'는 서울에 두 발을 두둥하고 내딛은 것. "어서옵셔~"식의 환영인사까지 바라진 않았겠지만, "여기서부터 정글입니다" 따위의 경고문은 붙여놔야 되는 거 아니었을까.

월세 16만 원짜리 산동네에선 '술이 마셔버린' 인간을 피해 뛰다가 내리막길에서 아크로바틱을 하기도 하고, 대림동 반지하방에선 물난리를 겪으며 수영계로의 입문을 고민하기도 했단다. 또 빌딩 옥탑방에서는 외부에 설치된 욕실을 오가느라 겨울이면 "성냥 사세요~"라며 하악하악 입김을 불어야만 했다고.

물론 그런 정글세계에서도 그녀를 버티게 해 준건 맹수 사이에 섞여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보증금을 절반으로 깎아달라는 앙탈에 허허거리다가도 순순히 중재에 나서주는 복덕방 할아버지들. 본인의 등판이 도화지인 줄 착각하고 살지만, 혼자 사는 여인을 위해 벌레와 강도퇴치에 나서주는 옆집 깍두기 아저씨들.

그리고… 남녀 간의 만남이 있다.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젊음의 한 과정. 하지만 역시 그녀답게 유쾌하고 발랄하게 추억된다. 착하디 착한 '순댕이'에서 술만 마시면 정신세계를 안드로메다 행 특급열차에 태워 보내던 남자. 스물네 살, 첫 맞선남을 게임방으로 이끌었다 결국 딱지를 맞았던 기억들.

홀로 서려는 젊음의 노력은 기록만 바라봐도 착실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시행착오마저 기쁜 웃음으로 기억되는 기억 저편의 그날들. 그리고 이 언니도 기어이 달걀 한 판의 육체적 나이를 가뿐히 돌파한다. 저자는 <옥탑방 로망스>를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서투른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한단다.

누구나 서툰 경험으로 일을 망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기억은 있지. 그건 잘못이 아니라 경험이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한 번의 경험은 두 번의 지혜를 낳는단다. 우리가 충분히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경험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 - 에필로그 같은 프롤로그 중

한편 책의 각 장 사이엔 살림살이와 이삿짐 꾸리는 법, 방범· 치안· 청소하는 법, 굶어 죽지 않는 법 등 자취생활의 실전에 관한 금과옥조 같은 팁들이 실려 있다. 나만의 싱글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이대로만 따라 해도 굶어죽진 않을 확률, 백 프로다.

결혼식 날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이라니!

 결혼식 날 울지 않을 수 있는 이. 몇 사람이나 될까.
 결혼식 날 울지 않을 수 있는 이. 몇 사람이나 될까.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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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결혼을 했다. 그럼 이거 반칙 아니냐고? 혼자 사는 이야기 희희낙락 풀어놓더니 결국 "안녕 싱글아!" 하고 무정히 손을 흔들면 어떻게 하냐고?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아직 그녀의 삶은 무궁무진하게 남아있다.

기다려 보자. 혹 <옥탑건물 주인으로 살아남기>등의 후반전이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어쩌면 먼 훗날 그녀를 닮은 '리틀 꼬냥이'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처럼 평생 철들지 않을 것 같은 그녀가 시집을 가던 날. 그녀는 또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단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해야 했던 것.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웨딩드레스를 적셨다는 그녀. 신혼여행으로 잡아놓은 전국일주 기간, 전국의 분향소를 돌며 하늘로 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게 5월 23일에 돌아가신, 그 분에 대해 이야기 해 주겠다고 한다. 잊지 않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고. 잊을 수가 없다고. 좌충우돌 철없던 젊음의 한 시점을 마무리 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가슴에 들어왔다고.


옥탑방 로망스 - 살벌발랄한 옥탑방 생존투쟁기

박봄이 지음, 행복한책읽기(2009)


#옥탑방로망스#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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