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역주행을 시작했다. 교육부장관 면담 시간은 8시 30분. 장관과의 면담을 30여 분 남겨놓고 도로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교육부 청사까지는 수십 킬로미터도 더 남은 것 같은데, 한 줄로 늘어선 차량들의 행렬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 당장 내려야겠습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한번 훔친 후 나는 결단을 하고 운전사에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지 모르던 차량 운전사와 건축회사 대표 스티븐씨가 고개를 뒤로 한번 돌아본 뒤,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거나 망설일 수가 없었다. 본 사업 전면 보류를 요청한 교육부장관과 어렵사리 면담을 계획했고, 약속시간을 어기어 괜한 빌미를 제공하면 절대 안 되는 상황.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여유롭게 나온 이른 아침부터,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인지 지나치다 싶은 차량정체로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자,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야겠어요. 지나가는 아무런 모터사이클이라도 잡아타야 해요. 아니면 저기 저 교통경찰 좀 불러주세요. 저 경찰 모터사이클이라도 타고 가야겠어요." 이미 나는 냉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정체된 차량들 사이로 비집고 지나가는 경찰 오토바이가 방금 내가 탄 차를 지나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마지막 남은 방법이다 싶었다.
이마와 겨드랑이에서 흐르는 땀은, 더위와 긴장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모터사이클' '모터사이클'를 외치다, 시간은 다시 20여 분을 남겨 놓은 상태가 되었다. 나는 무슨 한이 있더라도 약속에 늦어서는 안된다는 일념 밖에는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운전사는 뭔가 결심하는 듯 몇 마디 대화를 스티브와 나누더니 별안간 정체된 차량 틈을 헤집고 나왔다. 그리고는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연신 경적을 누른다. 상대편에서 진행해오는 차량들이 만만한 속도가 아닌 듯 했다. 어느새 반사적으로 내 손은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비는 세차게 쏟아졌고, 창밖은 아직도 바다가 보이는 풍경.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차량들은 한 시간이 지나도 아크라에 입성하지 못할 것만큼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고, 마주 오는 차량들은 고맙게도 우리 차량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일차선 도로, 정체된 차량 행렬 사이로 난 조그마한 틈새로 내가 탄 차는 미친 척 하고 역주행을 계속했다. 우리를 야단치려는 것인지, 반칙을 하는 우리를 숨겨주려는 것인지 빗줄기는 거세게만 몰아쳤다.
매일같이 오가던 그 길이 오늘따라 그렇게 가도 가도 끝없는 구만 리 길로 느껴질 줄이야 정말 몰랐다.
교육부가 바라보이는 중심가에 이르러서야, 내 생애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역주행은 드디어 끝이 났다. 교육부 청사 앞에 차를 세우고, 계약서가 담긴 손가방을 훔치듯이 낚아 채, 장관실이 있는 3층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은 거짓말 같이 8시 29분을 알리고 있었다. 장관실 건너편, 행정국장 아프라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8시 30분이다!
가나에 와서 수도 없이 약속 펑크를 당해오며, 그들에게 비난 받을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겠다는 집요한 다짐이 급기야 위험한 고속도로 빗길을 역주행하는 아이러니를 나 스스로 만들고 말았다. 그랬다. 이번 사업이 시작된 이후 최대 고비를 맞은 것이었다.
교육부 장관이 사업 잠정 중단을 요청해 온 것은 바로 이틀 전이다. 가나 동부 지역에 22개 학교를 건축할 업체 선정이 완료된 것은 지난 5월 말. 업체 선정이 완료되고 가나 교육부 여러 공무원들로부터, 왜 그 많은 학교를 짓는데 한 개 업체만을 선정했느냐는 질문을 끝도 없이 받아온 터다. 그러면서, 입찰에 참가한 업체들이 항의를 해올 것이란다.
정작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에게서는 설명회 이후 이렇다한 불만이 없는 상황인 데다, 무엇보다 입찰과정에서 가나 법규를 최대한 존중했는데 뭐가 이렇게 의견들이 분분한가 싶었다. 실은 가장 답답한 것은, 입찰 과정을 진행하면서 이런 저런 자료 요청을 할 때는,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면서 여러 가지로 일을 지연시키더니만 이제 겨우 입찰이 끝난 상황에서, 적반하장 격으로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6월 한 달 간, 선정된 업체와 최종 계약을 진행하고 사업 착수에 돌입하기 위해 선수금을 주는 단계. 업체로부터 각종 보증서를 은행을 통해 받아야 사업 착수를 위한 선수금 지급이 이루어진다. 교육부 장관의 사업 잠정중단 의사를 아프라니 국장으로부터 들은 것은 바로 이 때였으니 그 때의 자세한 정황은 이러했다.
서명 하나를 남겨두고, 거의 한 달 간 아무런 이유 없이 보증서 발부를 차일피일 미루는 은행을 찾아갔다. 참 참고로, 가나에서는 절대로 고객이 왕이 아니다. 직원이 왕이다. 고객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그저 의자에 앉아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게 전부인 이해할 수 없는 가나의 은행. 나는 은행 주요 간부를 찾아가서 더 이상 신뢰를 지키지 못하면, 은행 때문에 사업 수행을 결국 하지 못하겠다고 보고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다간 가나의 주요 관공서와 은행 직원들이 다 내 원수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마냥 웃으면서 기다리다 보면, 정말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지난 해 2월, 처음 가나를 방문하고 느꼈던 가나에 대한 몽환적인 동경, 느림에 대한 찬양을 넘어선 숭배는 이제 나에게 거의 남아있지 않다. 느림을 지나쳐 무책임함에 이르는 경우를 너무 자주 경험하면서, 나는 이상과 환상에서 내려와 지극히 현실적인 느림 반대론자가 되어가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들이 전혀 새로운 가치 체계가 작동하는 완벽한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 이상, 지금 여기에서의 그 느림에 대한 지지는 당분간 철회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이틀 째 찾아간 은행, 불과 어제 몇 시간 전에 했던 약속에 대해 언제 그랬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간부를 뒤로 하고 은행장에게 찾아갔다. 은행장은 그 진실 여부를 알 수 없으나, 일이 이렇게까지 지연되고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며 한달여간 미루어두었던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시간은 이미 은행과 대사관 업무가 모두 종료된 시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음 편하게, 기쁜 마음으로 서로 친절한 자세로 신뢰하면서 하나씩 일을 약속한대로 풀어나가면 서로 간에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동네방네 난리를 치고 나서야 일이 해결되고, 한 달 묶인 일이 한 시간 만에 해결되는 것이 나를 너무 서글프게 한다.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벌써 여러 번이다.
이틀을 속이 타들어가게 하고, 안면 몰수하고 업무가 종료된 대사관을 찾아가서 보증서와 관련 공문서를 제출했다.
어찌되었든 또 일 하나가 해결되었구나 안도하는 순간, 교육부에서 급히 면담을 원한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내가 가나에서 가장 신뢰하는 교육부 아프라니 행정국장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이야기는 아직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 나를 또 다시 코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교육부 장관님께서, 그 사업 잠정 중단을 요청했어요. 차 선생, 지금 급히 만날 수 있을까요?"
뭔가 큰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정신을 집중해야겠다 싶어, 냉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다급하신 일인 것 같은데 우선 대강이라도 지금 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2개 학교를 왜 한 개 업체에 주었느냐며 신임 교육부장관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행정국장의 목소리에는, 이번 사업에 피해가 갈까봐 염려하는 모습이 충분히 느껴졌다.
"일단 그런 상황이라면, 지금 말고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저 혼자 해결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입찰 규정 그 어디에도 한 개 업체와 계약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없다. 조항에도 없는 내용을 가지고 절차에 따라 완료한 계약내용을 문제 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교육부에서 이미 증인으로 계약까지 완료한 상태인데, 그것을 무효하겠다는 발상은 스스로의 법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것 아닌가?'
머릿속에 숱한 생각들이 스며들었다. 가나 입국 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6월 22 - 26일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게재 사진은 다소 시간 차이를 두고 촬영한 것입니다.
차승만(차동자) 기자는 KOICA-World Vision 협력 사업으로 가나에서 교육원조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